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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2


BY 은하수 2006-03-23

서울에서 처음 맞았던 봄은 아주 쌀쌀했다.

맑은 공기, 한산한 거리, 도보 10분의 짧은 등교길에 익숙하던 내게

서울은 공부 외에도 적응해야할 미지의 그러면서 위험천만의 공간이었다.

 

지금도 떠오른다.

버스에서 내려  욕을 흘리며 가는 청소부의 리어카를 따라가다

지저분한 골목을 빠져나온 후

매연과 소음으로 매캐한 아침공기를 맡으며

오가는 차들로 정신이 하나도 없는 언덕배기 차로옆 보도를 

올라가고 있는 열여덟 여자아이의 좁은 어깨가...

 

밝은 봄 햇살 속에 개나리꽃이 피어났지만

바람은 너무도 매서워서 꽃이 다 얼 지경이었다.

 

난 그 아이를 부러워했었던 것 같다.

둘다 친척집에 얹혀 살았지만 그 아인 이모집에서 살았다.

난 눈칫밥을 얻어먹고 있었지만  그 아인 사촌들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로 대접(?) 받으며 지내고 있었다.

난 느릿하고 내성적 성격으로 적응에 고전을 면치 못했으나

그 아인 특유의 명랑함과 유연함으로 서울생활을 잘 헤쳐나가는 것 같았다.

 

아니 난 그 아이의 붙임성 좋은 성격을 부러워했는지 모르겠다.

난 마음을 주는 친구가 그 아이가 다였지만

그 아이는 나 모르게 만나는 남자 동창들이 너무도 많았다.

연락해서 같이 만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들을 만날 때 나에게 얘기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당시에 난 그런 사실을 알지도 못했고 

나의 진실된 친구는 오직 그 아이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바꾸어서 그 아이에게도 내가 가장 가까운 친구일 것이라고.

그러나 안타깝게도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내게 재미있고 다정한 친구였던 그 아이는

나를 그저 관리해야 할 수많은 교우관계 중 하나로만 생각했는지 모른다.

지금에 와서 그 아이로부터 듣는 얘기들을 토대로 나온 추측이다.

 

물론 내게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항상 내 옆에 있어줄 것이라고 믿은 죄.

유쾌하게 다정하게 대해 주지 못한 죄.

그저 마음으로 통할 것이라고 너무 믿은 죄.

나의 깊은 속내나 고민 같은 걸 맘편히 속시원히 털어놓지는

못한 죄.(사실 그 아이에게 얘기하면 전국에 방송하는 거나 같다고 생각했었다.)

매력이 넘치는, 믿음직한 친구가 되어 주지 못한 죄.

 

내가 참으로 힘들던 그 때, 그 아이가 

어느날부터인가 갑자기 연락을 끊은 것이었다.

처음엔 애써 무시하자고 생각했다가도

그래도 소중한 친구라 생각했기에 연락의 끈을 놓지 않으려 했지만

그 아이는 아무런 메아리도 주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점점 멀어져 갔고 서로에게 잊혀져 갔고

시간이 우리를 갈라 놓았다.

 

이따금씩 생각나고 그리울 때가 있어 연락을 취해 보고도

싶었지만 인연이 닿지 않았다.

지난해 연말에 있었던 동창회 모임 이후 한 친구로부터

그 아이의 연락처를 알게 되었다.

그 아이가 제일 먼저 내 연락처를 묻더란 말과 함께.

내가 먼저 전화를 했고 그렇게 우리는 긴 이별 끝에 다시 만났다.

 

평온을 가장한 나의 표정과는 달리 그 아이를 향했던 그리움과

미움, 원망이 뒤섞인 마음이 속에서 용암같이 꿈틀댐을 느꼈다.

그 아이는 그런 내 맘을 아는지 아님 스스로 가책이 들었는지

그 당시에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연락을 끊은 것이라고

나를 위한 일이었다고 웃으며 얘기한다.

겉으로는 웃으며 그랬구나 할 수 밖에 없었지만 속으론 궁색한 변명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러다가 점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아이를 이해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내 뜻이 아니었던 만큼

일방적으로 당한 오랜 이별은 그 아이에 대해서 이제 더이상

어떤 신뢰를 가질 수도 없게 만들었다.

그 아이를 좋아했던 감정이 지금도 남아 있음을 부인하기 싫다.

하지만 그만큼의 믿음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지난 일요일 네 친구가 모인 자리에서

그 아이는 연말 동창회에 자기를 빠뜨린걸 두고두고 억울해 했다.

너도 소외되는 것이 싫긴 하구나!  그런데 왜 너는 내게 그랬니!

\"너 요번에 왕따 당한 거야.\" 그랬더니

\"그러게, 사실 니가 왕따되야 하는 것 아니니?\"  이런다.

이게 그 아이의 속마음이었단 말인가? 농담 속에 진담인가?

 

그 당시도 몰랐고  그동안도 쭉 몰랐는데

그 아이는 나 말고도 친구가 너무너무 많았다는 것에서 밀려드는

배신감이 나를 괴롭힌다.

 

밝고 명랑하지만 억척스러운 기질이 있는 그 아이.

말을 잘 하지만 비아냥거리는 열받게 하는 소리도 잘하는 그 아이.

잘해주다가도 못 믿을 구석이 있는 그 아이.

정이 넘치는 듯 살갑게 굴지만 돌변하는 그 아이.

맨주먹으로 올라온 서울에서 강남 아줌마가 된 그 아이.

제 잘난 척 하다가도 권태로움으로 금방 풀이 죽는 그 아이.

 

내가 그리워했던 건 무얼까?

내가 포기 못하는 건 무얼까?

 

그 아이에게서 묻어나는 지난날

추억의 진한 냄새는 아닐까?

나 자신의 자화상은 아닐까?

 

봄이면 찾아오는 가슴앓이는

서울에서의 첫 봄의 쓰라린 기억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