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전
남편의 직장 장기근속 20주년 기념으로 회사에서 보내준
태국여행길에서 남편이 사준 빨간 손지갑이 있다.
무슨 바다동물의 껍질로 만든것인데 칼이 들지않아
내용물을 잃을 염려가 없다고 했다.
그 지갑을 지금까지 가지고 다니는데 요즘 지갑이 가끔 말썽이다.
지퍼가 고장났는지 잠가도 자꾸 벌어진다.
A/S를 받아야 하는데 시간도 마땅찮고 메이커를 찾으려면 번거롭다.
물론 백화점 어디쯤 가면 있겠지만......
그래도 이 지갑을 선뜻 버릴 수 없는 애잔함이 있다.
이 지갑은 그동안 나의 일상을 책임지고 있었다.
각종 은행현금카드와 신용카드, 주민등록증과 운전면허증, 포인트카드,
영화관 마일리지카드,병원멤버십카드,내 명함
그리고 누군가에게 받은 명함들
언제나 배를 불룩하게 하고는 내곁에서 나를 든든하게 지켰다.
남편이나 아이들에게 넉넉한 용돈을 주지 못했지만
비상시를 위해 이지갑을 마르지 않게 하려고 많이 노력했다.
나는 가끔 이지갑을 홀대했다.
아무곳이나 던져놓고는 무심하게 있다가 찾느라 일쑤였고
어느곳에다 놓고 그냥 집에와 부랴부랴 찾으러 나간적이 있고
그러다 보니 신용카드 분실신고도 여러번 했었다.
지폐한장 없이 배도 곯리고 어느땐 무거운 동전만 잔뜩 넣어두고 힘겹게
만들었다.
아이들이 돈을 달랄때 짜증스럽게 지퍼를 열었던 적이 있고
쓸데없는 지출로 후회스러울때도 지갑만 괴롭혔다.
하지만 이지갑은 언제나 나의 후원자였다.
나의 부족함을 채워주고 꿈도 심어주었다.
가끔 길을 걷다가 봄나물 파는 할머니를 만나면 봄나물
한바구니를 사오기도 하고
자동차를 운전하다 갑자기 기름이 떨어져 자동차가 허덕일때
배를 채워주는 기쁨을 주기도 하고
아이들이 필요하다고 할땐 지갑 구석에 몰래 감춰두었던
빳빳한 신권까지 아낌없이 내주었다.
남편에게 받았던 세뱃돈도 아버지의 세뱃돈도 고이 간직했다가
결국 아이들에게 지출 되었지만
내 지갑은 그 형태를 변하지 않게 보관했다가
기분좋게 쓰여졌다.
어느땐 이 지갑 안에는 아들이 아르바이트 해서 벌었다고
준 지폐도 자랑스럽게 들어있었고 내가 받은 패이도 나를 든든하게 했다.
통장을 넣고 은행을 가면서 기뻐했었고 의료보험카드를 넣고 병원에
가면서 근심했었다.
오늘아침도 큰 아이에게 만원짜리랑 신용카드를 꺼내주었다.
아직 취업공부로 엄마에게 돈 이야기를 자신있게 하지 못하는 큰아이에게
아무말 없이 꺼내주며 시험원서접수를 한다는 아이의 뒷모습을
아린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엄마 지갑만 열면 모든게 다 이루어 질 것 같은 꿈을 꾸는 아이들
엄마가 한국은행인줄 아느냐고 가끔 볼멘소리도 하지만
나보다 아이들을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더 많이 지퍼를 열었던 손지갑.
아이들에게 작은 돈을 아껴야 큰돈을 누군가를 위해 쓸수 있는거라고
말하면서
10원짜리도 주워드는 나를 그냥 묵묵히 받아주는 지갑.
1원짜리 은동전도 오원짜리도 들어있는 내지갑.
오늘은 그 지갑의 지퍼를 다시 조여야 겠다.
올해들어..참으로 많은돈을 지출하느라 애쓴 지갑을 잘 구스르고 아껴
몇년간 더 내손에 쥐고 다녀야겠다.
나를 눈부시게 가꿔주었고
우리가족을 지켜주었고
그리고 내가 알고있는 주변을 위해 가끔은 아낌없이 열었던 내 지갑
이 지갑을 들고 또 하루를 시작한다.
오늘 지갑을 열어야 하는 일이 몇번이나 생길지 모르지만
나보다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지갑을 순순히 열어보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나는 지금 세상으로 나가려한다.
내 낡은 지갑속에 사랑을 담아 돌아오고 싶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