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으로 우리 큰 어머니는 아주 어려운 분이셨다.
웃는 얼굴을 한 번도 보여주질 않으신 그야말로 근엄 그 자체셨기 때문이다.
그런 큰 어머니가 돌아가신것은
내가 초등학교 육학년이 될 무렵, 한 동네에서 살다가
읍내로 전학을 온 그 해 겨울, 설을 이틀 앞둔 날이었다.
당시 큰집이 있던 시골은 전화 뿐만아니라 전기도 들어오지 않은 곳이었기에
이른 새벽, 우리집에 있는 전화로 친지들에게 부고를 알리기 위해서 오신
친척 오빠의 얘기를 듣고 알게되었는데....
우리 큰 어머니....
16살에 14살이면서 학생이었던 우리 큰 아버지와 결혼을 하셨단다.
큰 어머니가 결혼을 하신 그 무렵에 시동생이신 우리 아버지께서 태어나셨기에
큰집에 가면 할머니가 계시긴 했어도
내 입장에선 큰 어머니도 굉장히 큰 어른이셨다.
너무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셔서인지
21살때에서야 아기를 낳으셨고....
그동안 큰 아버지는 서울에서 학교를 마치시고 동경으로 유학을 떠나셔서
그곳의 대학을 졸업하시고 금의환향 하는 길에 이쁜 신여성과 동행하셨다.
그리곤 고향 앞산 너머 조그만 집에 살림을 차리시고는
저녁을 드신 후에는 그 산길을 걸어 그 집에 가셨다 한다.
흰 눈이 펑펑 내리던 날 밤,
눈이 발목을 덮도록 많이 쌓인 그 하루도 빼놓지 않고 그 길을 가셨다고 하는데
그 기나긴 밤, 한숨과 눈물로 긴 밤을 새우셨던 큰 어머니는
다음 날 아침,
시앗 집에서 주무시고 오신 큰 아버지를 위해서 따뜻한 아침 진지를 지으시고
진지를 드시는 그 옆에 앉아서 생선 가시를 발라 수저 위에 올려 주셨다는데
그 쓰리고 아픈 속마음을 큰 아버지께는 내색 못하시고
큰집 오빠들이 당신들의 엄마인 큰 어머니를 항상 무서워 했다는 것을 보면
그 한을 자식들을 엄하게 키우시면서 푸셨던게 아닌가 싶다.
아홉살무렵 어쩌다 큰 집에 심부름을 시키는 엄마께
\"엄마, 나 큰집에 가면 큰 어머니 무서워....\" 하며
큰 어머니가 어렵다는 표현을 무섭다는 표현으로 말하는 내게 엄마는
\"큰 어머니가 너를 얼마나 이뻐하는데 그러냐...\" 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큰어머니는 웃을 일이 없으셨을 것 같다.
시어머니인 할머니가 계셨고 또 할머니보다 더 먼저 돌아가셨기에
한 번도 살림을 쥐락 펴락 할 수 있는 곳간 열쇠를 쥐어 본적도 없을 뿐만 아니고
큰 아버지의 사랑마저 빼앗긴 것도 모자라
월북하시는 길에 행방불명 되신 큰 아버지를 영영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셨으니
가슴에 얼마나 많은 한이 남았을까?
그런 한을 가슴에 담으셨던 분이 우리 엄마가 시집 오셔서 한 집에 사실 땐
큰 아들과 동갑이면서 아랫동서인 엄마를 무척 아끼셨다고 한다.
새댁인 엄마가 바느질 하다가 피곤함에 그냥 잠들어 버리면
큰 어머니께서 아무말씀 없이 바느질을 전부 끝내놓아 주시는가 하면
아기가 깨어 우는 줄도 모르고 자고 있을땐
말없이 아기를 데리가 가서 재우셨다는 우리 큰 어머니....
며칠전 lala47님의 글을 읽으면서 자꾸만 우리 큰어머니의 모습이 겹쳐져 왔다.
30년도 훨씬 지난 지금에서야
그리고 나도 중년의 여인이 되고서야
우리 큰어머니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읽게 된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