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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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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비싼 동정


BY hayoon1021 2006-03-06

 

 

값비싼 동정


1985년 봄,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남들 다 가는 고등학굔데도 나는 입학하는 날부터 죄인 심정이 되어야 했다. 없는 형편에 계집애를 고등학교까지 공부시킨다는 아버지의 유세가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대단한 유세에 걸맞은 지원은 거의 없었다. 상고의 필수품인 주판조차 남이 쓰던 걸 얻어 썼으니, 문제집이나 참고서 따위는 꿈도 못 꾸었다. 내야 할 돈이나 미술준비물을 못 해 가서 창피를 당하는 것도 이력이 붙을 지경이었다.

사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다만 공납금만 제 때 낼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매번 전교에서 꼴찌가 될 때까지도 공납금을 못 내서, 담임선생님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그렇게 주눅 든 상태에서 학교생활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나는 늘 어두운 표정이었고, 짝꿍 말고는 누구한테도 마음을 열지 않았다.

1학년 2학기를 힘겹게 맞이했을 때, 학교는 더 이상 내 사정을 봐 줄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10월 중간고사가 끝날 때까지 완납하지 않으면 등교정지라고 했다. 나는 담담하게 그 통보를 받아들였다. 아버지는 내 공부를 계속 시킬 뜻도 돈도 없었고, 선생님이라고 무슨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학교를 포기했다. 언젠가는 맞닥뜨릴 일이라는 생각을 오래 해 와선지 몰라도 순순히 마음 정리가 되었다. 미련 같은 것도 없었다. 이제 공납금 때문에 들볶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홀가분하기만 했다.

학교를 떠나던 날, 선생님은 종례시간에 나를 앞으로 불러냈다. ‘마지막으로 친구들한테 인사는 해야지?’ 선생님은 작은 목소리로 내게 권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다시는 안 볼 아이들 앞에서 초라해지고 싶지 않았다. 선생님은 한숨을 내쉬며 그만 들어가라고 했다. 아이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나를 쳐다보았다. 얼굴이 확확 붉어지고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나는 도망치듯이 교문을 빠져 나왔다. 짝꿍이 뒤에서 불렀지만, 난 돌아보지 않았다. 

학교를 그만 둔 다음날, 나는 바로 가방을 싸서 집을 나왔다. 중학교 때 친구가 다니는 직물공장에 들어가기로 얘기가 돼 있었다. 숨 막히는 집과 학교를 동시에 벗어난 해방감에 나는 날아갈 것 같았다. 더는 누구 눈치도 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제일 좋았다. 나는 내 힘으로 돈을 벌어 멋지게 살아가리라는 결심을 하고 또 했다.

하지만 전날 저녁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꼬박 12시간을 일해야 하는 야간근무는 단박에 내 기를 꺾어 버렸다. 직물공장은 기계를 24시간 돌리기 때문에 2교대 근무가 필수조건이었다. 하룻밤도 아니고 일주일 내내 날밤을 새야 하는 강행군은, 초보인 나로선 감당하기 힘들었다. 새벽 서너 시경, 한계에 다다른 몸으로 요란한 베틀소리를 들으며 서 있노라면 아득한 절망 같은 게 밀려왔다.

나는 돈 버는 일이 제일 쉬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예상치 못 한 복병 앞에서 나는 당황했다. 내가 세상을 너무 만만하게 보았다는 걸 깨달았다. 지겨웠던 집과 학교가 실은 가장 든든한 울타리였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마침 공장이 문을 닫고 친구와도 사이가 틀어지면서, 나는 얼른 가방을 다시 쌌다.

단 열흘이었지만, 몇 달은 헤맨 것처럼 지친 마음으로 나는 집에 돌아왔다. 낮이라 집은 텅 비어 있었다. 큰소리 치고 나갔다가 슬그머니 돌아온 꼴이어서 저녁에 가족들 볼 일이 찜찜했다. 그래도 익숙한 집 안을 둘러보는 동안 마음이 좀 편해졌다. 그때, 책상 위에 못 보던 유리 상자가 놓여 있는 걸 발견했다. 상자에는 알록달록 종이학이 가득 들어 있었다. 종이학 옆에는 편지뭉치며 새 앨범, 새 일기장도 있었다.

내가 없는 사이에 선생님과 친구들이 다녀간 것이었다. 마치 내가 상처받고 돌아올 줄 알았다는 듯이 그것들은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나는 그 선물들이 달갑지 않았다. 편지는 더더욱 싫었다. 그들의 의례적인 동정이 내 처지를 더 비참하게 만들 것 같아서였다. 역시나 편지 내용은 한결같았다. 이렇게 갑자기 헤어져서 섭섭하다, 꼭 다시 학교로 돌아와라, 용기 잃지 마라, 이럴 줄 알았다면 좀 더 친하게 지낼 걸 그랬다, 등등.

나는 내용보다는 편지지 색깔이나 모양에 더 관심을 보일 정도로 성의 없이  편지를 읽어 나갔다. 그런데 차츰 놀라운 일이 생겼다. 내용은 비슷해도 필체가 제각각인 편지 한 장 한 장에 담긴 진심이 차츰 느껴지면서, 시들하던 내 심장이 팔딱팔딱 뛰기 시작한 것이었다. 마지막 인사조차 안 한 내게, 그들이 베푼 친절은 너무 과분했다. 30여 통이 넘는 편지를 다 읽는 동안, 옹졸했던 나에 대한 부끄러움과 그들에 대한 고마움은 커져만 갔다. 

내 짝꿍은 이렇게 말없이 떠날 줄은 몰랐다며 단단히 삐쳐 있었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아무 도움이 못 돼 줘서 미안하다고 했다. 종이학은 친구들 몇 명이 방과 후 남아서 접은 거라고 했다. 사나흘 만에 천 마리 종이학을 채우느라 수고했을 친구들을 생각하니 콧날이 시큰했다. 누군가가 오직 나만을 위해 종이학을 접었다는 것, 그건 참 특별한 느낌이었다. 

결국 나는 11월의 싸늘한 방 안에서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 학교를 그만두던 날도 흘리지 않던 눈물이었다. 내가 먼저 등을 돌렸을 뿐 나는 혼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오래오래 기쁘게 흐느꼈다. 흔히 값싼 동정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하지만 나는 태어나서 그렇게 값비싼 동정은 받아보지 못 했다. 모든 편견이 눈 녹듯 사라지고 나니, 그제야 허탈하게 돌아섰을 선생님과 친구들이 보고 싶어졌다. 그때였을 것이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이제 뭘 해야 할지 막막하던 내게 번쩍하고 앞이 보이는 듯했다. 할 일을 찾은 것이었다. 학교로 다시 돌아가는 일은, 돈을 벌어 멋진 인생을 살겠다는 꿈보다 훨씬 가깝고 구체적이어서 좋았다. 그 얼마 후 난 집 근처 봉제공장에 들어갔다. 월급도 적고 하루 종일 먼지를 들이마시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만, 목표가 있어 견딜 수 있었다.

일 년 뒤 나는 복학했고, 여전히 가난했지만, 마음가짐은 전과 달랐다. 무엇보다 억지로라도 자신감을 갖고 당당해지려고 노력했다. 그런 자세는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는데도 큰 힘이 되었다.

그 계기를 마련해 준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선생님과 친구들이다. 그들에 대한 고마움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