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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없는 데이트


BY 모퉁이 2006-03-06

 \"영화나 한 편 보러 갈까?\"

 

언제부터 나온 말이긴 한데 주말이면 이런저런 일이 생기고

 때론 잊어버리고 하여, 어제 부로 역대 영화 흥행 순위

1위였던 [태극기 휘날리며]를 따돌렸다는 [왕의 남자]를

나는 보지도 못하고 입소문과 메스컴이 전해주는 내용만

전해듣고 조만간 티비에서 특집 영화로 나오면 그때나 볼까 기다리는데

기어이 어제는 영화관에 가자는 남자를 따라 극장가에 갔었다.

 

집에서 가까운 종로 3가에는 극장이 몇 군데 있다.

인터넷에서 상영시간을 알아 본 극장은 얼마전에 내부 수리하여

새단장 한 극장이다. [왕의 남자]는 이미 도를 넘은 영화이니

계획대로 티비나 비디오로 보기로 하고

어제는 제목부터 음침한 영화 [음란서생]을 예매했다.

\'뭔  제목이 저래 음란하다냐?\' 하면서도 서로 내심

어떤 음란한(?) 생각들을 가지고 상영을 기다릴지를 모르겠다.

 

10시 경에 늦은 아침을 먹고 놀다 씻고 종로 3가에 나간 시간은

오후 1시 20분이었다. 2시 40분 상영 티켓을 끊어놓고 1 시간

20분을 어디서 뭐하나 고민할 것 없이 점심이나 먹자고 했다.

그런데 이 남자가 아침 먹은게 아직 속에 남았다며 점심을 거절한다.

\'츠암..지금이야 그렇지만 영화가 끝나면 이른 저녁이 될터인데

그때까지 속 쓰리지 않을까? 그리고..집에 있으면 점심 굶나?\'

그럼 가까운 페스트푸드점에 들어가서 간단하게 요기하고 거기서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 하면 되겠다고 했더니 햄버거라면

질색을 하는 성질을 그대로 나타내면서 커피나 한 잔 마시자고 한다.

커피값이 식사값보다 비싸다는 걸 모르고 하는 소릴거여.

커피를 마시느니 백반을 먹겠다는 말을 뱉으려다 참고는

커피고 햄버거고 백반이고 모두 거절하고 그냥 극장 안 의자에

앉아서 1시간 20분을 잡아 먹자고 했다.

금은방이 줄지은 상가 앞에 서더니 보석 구경이나 하잔다.

보면 사고 싶을터인데..그렇다고 당장 구입할 처지도 아닌디

눈만 버리게 뭐하러 보냐고 입을 삐죽거리며 그것도 사양했다.

그리고 한 시간 20분을 지루하게 보내야 했다.

남자는 이런 내 속내도 모르고 영화 팜플렛을 가져다 세세하게 읽고는

여러 영화 내용을 내게 가르쳐준답시고 소곤대었지만

나는 대답도 대꾸도 하지 않고 눈 앞에 걸려있는 대형 모니터에

눈을 꽂고 영화 예고편들을 보고 또 보고 있었다.

 

날씨가 좋은 탓인지 극장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등산을 하고 그 차림새로 온 부부도 있었고

대부분이 젊은 연인들이었지만 와중에는 우리같이 늙수레한 중년 부부들도

있었는데 모두들 한결같이 팝콘봉지와 빨대를 두개씩 꽂은 음료수를

들고는 휴식 의자에 앉아 다정하게 앉아 나눠 먹고 있었다.

별 다른 이야기가 없어도 그 모습만으로도 좋아보였다.

그런데 참..내가 생각해도 이 남자 무드 참 없다.

\'데이트하기 참 좋은 날씨다\'하며 집을 나설 때까지는 좋았는데

막상 시작된 데이트를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모르는 남자다.

등산을 가도 전투하듯 목적지를 향해 그곳에 다녀오는 것으로 만족하고

마트에 가도 적어간 물품만 사면 돌아와야 되고

극장에 가면 영화만 보고 오면 그만인 줄 아나보다.

 

아무말 없이 모니터에 눈을 갖다 대고 있는 나를 보고

\'팝콘이라도 한 봉지 사올까?\'할 때 그만 속을 풀고

\'그러라\'하면 될 것을 이넘의 목구멍에서는 왜 또 다른 말이

튀어 나오는지..\'됐어..\'

정말 괜찮은 줄 아는 남자는 일어서다 도로 앉는다.

그때 내 앞에 멋을 한껏 부린 아가씨가 초조하게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습이 들어왔다.

날씨가 화창하기도 했지만 성급하게 차려입은 봄옷이 무척 화사했다.

화장이 약간 진해 보이긴 했지만 신경써서 한 듯하고

구두는 벌써 여름에 가까이 간듯해서 내 시커먼 상의와 검정색 바지와

검정 구두가 무척 둔하게 보였다.

아가씨는 아까부터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은데 그 누군가는

영화 상영 시간이 가까워 내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나타나 주지 않아서

한껏 멋을 부린 그 아가씨의 노력이 애처로워 보였다.

아가씨가 일찍 나온 것인지 그 누군가가 늦게 오는 것인지

그러게 약속을 했으면  왠만하면 지켜야 하는데 말이지.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왜 웃냐고 물었지만 \'그냥..\'하고 말았다.

 

중간중간 웃음과 찡한 장면 몇 군데 빼고는 제목만큼 음란하지는 않았다.

2시간이 넘는 영화를 보고 나오자 저녁 5시가 되었다.

아침 10시에 먹은 밥이 여태 속에 남아 있을 리가 없다.

\'저녁을 먹고 갈까?\' 한다.

이런..저녁은 무슨..초저녁에 먹고 야참 먹을 일 있남?

\'집에 가서 먹자\'고 잘라 말하고 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서 생각하길..\'괜한 고집을 피우는 건가?\'싶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남편은 식탁 위에 과자를 하나 집어 먹고

나는 쌀을 씻어 심드렁한 저녁을 했다.

외출한 아이들을 기다릴 새도 없이 밥을 펐다.

\"영화 재미없더나?\"

뭔가 낌새를 느꼈는지 그때사 묻는다.

\"영화가 재미없던 게 아니라 당신이 재미없었지\"

헉~갑자기 왜 그런 말이 튀어 나왔을꼬.

내가 하고도 좀 심한 말투였다.

말없이 밥을 먹고 베란다로 나간 남편은 뭘 했는지

설겆이를 끝내고서야 들어왔다.

 

이승엽이 홈런을 치는 야구를 보면서

아까 던진 대사를 잊은 듯 좋아라도 해봤지만

이번엔 남편이 약간 시무룩하다.

딴에는 하느라고 시간 내어 영화도 보고 저녁까지

먹고 들어올 양이었는데 퇴짜맞고 기껏 듣는다는 소리가

재미없는 사람이라니 기분이 상했나보다.

말은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 달리 전달이 된다.

그래서 싸움은 사소한 일로 시작되어 크게 번지는 것이다.

마침 행복한 부부,이혼하는 부부,행복한 부부의 비밀이란

내용이 방송되었다.

부부싸움은 내용보다 전달하는 과정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나역시 그랬던 것 같다.

영화가 끝나면 시장할 것 같으니 밥을 미리 먹자고 했다면

남편이 이래저래 자기 계획을 이야기 했을 수도 있을텐데

혼자 지레짐작하고 재미가 있느니 없느니 하며

남편 고개를 꺽어 버리는 못된 언어 습관을 무심코 뱉어 버리지는

않았는지 반성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잘못한게 없다 싶으면 며칠씩 고집을 부리는 고약한 성미를

남편도 안다.그런 나를 챙겨준 사람이 남편임을 나도 안다.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아침 배웅을 했지만 남편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미안하고 부끄러웠다.그렇다고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좋은 아침~이따봐요~\' 싱겁긴 해도 이 정도의 글이라도

날려 보낼 애교없는 마누라가 좋기만 할까.

엉뚱데서는 발생하는 그 푼수끼가 정작 써야 될 때는 행방불명이다.

 

얼마전에 해먹고 남겨둔 해물찜 재료가 냉동실에 있다.

오늘은 저것으로 정성껏 양념해서 어느날보다

더 맛있는 해물찜으로 매실주 한 잔 나눠 마시며

술 기운을 빌려서라도 푼수짓 좀 해야겠다.

설마 2차전으로 이어지지는 않겠지?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