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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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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자다


BY 개망초꽃 2006-02-03

내 주머니는 두둑하다. 부자가 별거겠냐 지금 나는 부자다.


딸아이는 세뱃돈 받은 걸 반으로 툭 갈라서 십만 원을 내게 주면서 옷을 사 입으라고 했다. 얼마 전 명동으로 친구를 만나러 가던 날 외출복이 마땅하지 않아 십년이나 된 짙은 회색 겉옷에 청바지를 입고 나가는 걸 보고서 엄마도 외출복이 없네 했었는데, 자기 자신도 옷이 없으면서 엄마를 먼저 생각했나보다. 나는 사양하지 않고 고맙다, 하면서 날름 받아 챙겼다. 그것을 보던 친정식구들이 상아 철들었네, 했다.


아들아이는 아직 돈 쓸 줄을 몰라서 작년에도 올해도 세뱃돈 받은걸 봉투째 나를 주었다. 너 올 해 중학교가니까 돈 쓸 때가 많을 거야 보태서 써야겠다, 하고 아들아이 것도 냉큼 받아 넣었다. 그래도 약간 미안해서 사고 싶은 거 없냐고 물었더니 상윤인 중학교 들어갈 때 책가방이나 사 주세요, 한다.


친정엄마는 남동생네랑 명절 음식을 싸주면서 내게 뭐든 더 많이 싸 주셨다. 그러면서 올케를 쳐다보며 형님네는 얘들도 크고 돈 버는 사람도 없으니까, 하셨다. 올케는 전 안 가지고 가도 돼요 형님네 다 주세요, 하면서 참치를 자기 보따리에서 내 보따리로 옮겼다. 이틀 동안 친정에서 배불러 터지게 먹고서 양손으로 들 수 없을 정도로 음식을 싸가지고 왔다. 냉장고엔 고기와, 햄과 참치와 식혜가 찰랑찰랑하다. 냉동실엔 전과 떡국 떡과 만두가 탱글탱글 얼어있다. 한동안 주식거리는 안 사도 되겠다.


화장실 수납장엔 비누와 치약과 샴푸가 차곡차곡 쌓여있다. 세숫비누가 다양해서 무지개떡같다. 샴푸도 향기를 풍겨 화장실은 꽃이 만발한 온실 같다. 일년 동안 세제 살 일이 없겠다.


애들 아빠는 생활비와 구두상품권을 줬다. 생활비는 당연히 받았지만 구두상품권은 받지 않았다. 나야 집에만 있는데, 질긴 가죽구두가 필요하지 않다. 애들 아빠는 구두가 필요할 것이다. 애들 아빠와 호수공원 선인장온실로 가서 작은 선인장 화분 네 개를 골랐다. 햇볕이 거실까지 네모다랗게 들어오면 텔레비전 위에 올려진 선인장 화분을 거실창가로 데려다 놓았다. 선인장은 해가 질 때까지 햇볕과 말없이 논다. 우리 식구는 그 모습에 행복이 따스하다.


어제는 딸아이가 월급봉투를 하얗게 내밀었다. 한 달 동안 스티커 사진가게에서 일한 월급 삼십만 원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내게 줬다. 삼백만원도 아닌 삼십 만원이었지만 내겐 삼천만원의 가치가 있었다. 가슴이 뻐근하고 눈 주위가 뜨거워졌다. 난 안 그런 척 오호~~한달 월급이네, 고생 많았다 얘~~ 하면서 받았다. 그러면서 철있는 묵직한 딸 월급을 철없는 가벼운 엄마가 되어서 내일 옷 사 입으러 가야지 했더니, 딸아이는 봄 옷 예쁜 거 사 입어, 한다.


겨울시작부터 동물털이 조금이라도 달린 겉옷을 사고 싶었다. 그러나 형편상 그건 나에게 사치라는 걸 알기에 폭신하고 고급스러운 반코트를 사 입어야하지 벼르다보니 벌써 겨울옷은 들어가고 봄옷이 판을 치는 계절이 되었다. 딸아이가 준 월급봉투를  신비스런 자수정석처럼 들여다보고 안방 서랍장 위에 그대로 놔 두었다. 오며가며 자수정석이 보이게 한동안 올려 놓을 것이다. 자식에게 처음으로 받은 월급을 내가 어떻게 쓰겠는가, 고급스러운 옷 안 사 입으면 어떤가, 나는 지금 부자다. 거실창가엔 화분 네 개가 눈부시게 반짝인다. 냉장고는 배터지게 먹고 늘어졌다. 화장실엔 세제들의 향기가 알록달록하다.


사실이다. 난 돈 많은 부자가 부럽지 않다. 가난은 불편하고 자존심이 상해서 가난하고 싶지는 않지만 삐가번쩍한 자가용도 부럽지 않고, 평수 넓은 집도 내겐 올려다 볼 나무가 아님을 몇 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님을 알면서 그래도 부러울 때는 부질없다로 스스로 나를 달래며 살았다. 지금 내게 제일 부러운 것은 작은 시골집을 가진 사람들이다. 뒤엔 산이 있고 옆으론 도랑이 흐르고 앞엔 냇물이 흐르는 시골집. 아이들이 준 이 돈을 옷 사 입는데 쓰지 말고 차곡차곡 쌓아서 시골로 향한 꿈을 꾼다. 이런 내가 우습다. 이 돈을 모아봤자 얼마나 모으겠냐마는 꿈을 버리지 않겠다는 뜻이다. 희망을 버리지 않겠다고 혼자 약속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