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이 서울의 새로운 명물로 태어나 화제다. 청계천에는 여러 가지의 볼거리 외에도 \'전태일 거리\'도 조성되었다는데 그래서 언제고 꼭 한 번 가 볼 요량이다.
1948년 대구에서 태어난 전태일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부모, 동생들과 함께 서울로 옮겨 왔다. 쌍문동 산꼭대기에 단간 판자집을 지어 여섯 식구가 막노동을 하면서 겨우 연명했다. 10살을 넘어서부터는 동대문시장과 서울역 등에서 온갖 힘든 일을 해준 대가로 얼마 안 되는 푼돈을 벌어 생계를 해결했다. 전태일은 1965년에 재단기술을 배워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의 재단사로 들어갔지만 그의 삶은 여전히 부박하기 짝이 없었다. 전태일은 그 곳에서 미싱사로 일하면서 참으로 열악한 노동환경과 노동착취에 대해 의식의 눈을 개안하게 된다.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그리고 건강을 해치는 열악한 환경과 최소한의 보호장치도 없는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노동자들의 현실을 보면서 그는 울분했다. 그래서 작업환경 개선을 끊임없이 요구했으나 정부와 업주는 여전히 치지도외하며 불성실한 태도로 일관했다.
결국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6가의 평화시장 구름다리 앞에서 500여명의 노동자들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시위를 벌였고 이 때 22살이던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책을 꼭 안은 채 \"노동자들을 혹사시키지 말라!\"며 분신자살 했던 것이다.
결국 이처럼 충격적인 사건은 당시 학생과 재야, 그리고 지식인들에게 소외된 계층으로서 고도성장의 그늘에 가려진 노동자들의 어두운 현실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주는 커다란 자극과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전태일은 이후 2001년에야 비로소 민주화운동 보상법에 따라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공식 인정됐다. 하지만 엄연한 현실은 지금도 전태일과 같은 비정규직과 이른바 특수고용직이라는 미명으로서 최소한의 대우조차도 받지 못 하고 가난과 어둠에서 시들며 살고 있는 노동자들이 부지기 수라는 것이다. 그러한 뒤에는 정부의 무관심과
일부 각다귀와도 같은 사업주(사장)들이 버티고 있으며 그들은 지금도 가련한 노동자들의 피와 땀을 빨아먹으며 자신만의 치부(致富)에 광분하고 있는 때문이다. 35년만에 되살아나게 된 청계천의 \'전태일 거리\'를 교훈과 모델로 삼아 삶의 주인공이었던 제 2의 전태일이 다시는 이 땅에 태어나지 않도록 정부와 사업주 모두 대오각성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