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아이가 중 3 이 되면서 해야 할일들이 많았다.
3월 초부터 국어 ,수학 ,영어 경시를 시간이 나는 대로 치루었다.
교내 경시에서 세 과목 모두 합격을 한후 대외 적인 경시를 시작하였다.
그것도 한 과목도 아닌 세 과목 씩이나.
중간 중간 중간고사 기말고사 내신 관리를 하면서
여름 방학동안에도 모 대학 전국 경시대회를 치루었다.
개학을 하면서 충청남도 모의고사를 치루기가 바쁘게 중간고사를 보면서 시평가 도 평가를 또 치루면서 졸업시험을 치루었다.
이게 사는건가.
이러다보니 눈만 뜨면 시험이다.
그렇게 경시를 치루다보면 성과가 좋은것도 있고 생각이외로 상처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
강조 하건데 우리 아이는 분명히 영재가 아님을 밝힌다.
그 보다도 우리 아이가 가장 힘들었던것은 체육에서 실기 점수를 받아내는 일이었다.
죽일 놈에 체육실기.
구기 종목은 발목에 큰 부담을 주지 않아서 견딜수 있었지만
줄넘기 종목에서 남들이 2단 넘기를 10 번하면 만점을 받을것을
우리딸은 왼쪽 한발로 100 여번을 넘게 해야했다.
작년에 수술했던 발목에 부담이 많이 갔다.
다리가 팅팅 부어서 다리 굵기다 왼쪽에 비해면 두배에 가까웠다.
밤마다 물찜질을 했다.
학교도 데려다주고 데려와야 했다.
애가 길바닥에서 노상 영어 단어를 외운다.
이 애는 특별히 영어 단어를 외우는것을 보지 못했다.
길에서도 그런식으로 다니기때문에 교통 사고로 멍이 든 우리 집에서는 그 애를 그냥 놔둘수가 없었다.
아빠와 조금씩 부딪히기도 했다.
우리 남편이 제일 못 봐주는것.
애 학교 데려다 주는것.
애를 저렇게 길러서 어떻게 써먹을 거냐구.
그러나 우리 모녀는 악착같이 공부를 하면서 적당 적당 아빠의 도움을 청하며 학교를 오갔다.
내가 등신이지.
교통사고에 멍이 든 나는 운전을 못한다.
그런 속에서 마지막 시험 결과가 나왔을때 전교 2 등
우리 아이는 모 대학 부설 고등 학교에 입학 자격이 주어졌다.
이 고등학교는 들어가기가 힘든 고등학교였다.
특히 여자아이들은 정원이 얼마 안되는데다 외부 각처에서 모여들기때문에 더 힘들다.
합격 통지서를 받는날 이불을 뒤집어 쓰고 울면서 웃었다.
그렇게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미친듯이 공부를 하더니 결국을 해냈구나.
장하다 내 딸!
자꾸만 눈물이 났다.
교복을 맞추고 돌아오던 날에 눈발이 드문 드문 내렸다.
신발도 아주 좋은것으로 사줬다.
아주 폭신 폭신 했다.
우리 모녀는 신발때문에 멍이 든 사람이다.
지금 다니는 중학교에서는 운동화를 선택해서 신는다는것이 엄청 까다로웠다.
복숭아뼈가 툭 튀어나왔기 때문에 신발이 그곳에닿으면 아프기 때문이다.
학교측에 건의를 하면 봐줄수도 있는일인데도 그냥 견디기로 했다.
휴~ 조금은 한숨을 돌렸다.
그러나 곧바로 작은 아이를 충청남도 영재교육원에서 주최하는 영재교육 대상자 선발
시험을 치루었다.
지금은 수학 부문에서 1차 합격을 한후 2차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남들이 나를 엄청 부러워한다.
특히 작은 아이는 학교 내신이 별로 좋지 않은데 경시를 치루면 성적이 좋은 편이다.
그런데 .......
남편도 투덜 거리기는 하지만 예나 다름없이 자기 자리를 잘 지키는데
참 별일이다.
왜 그렇게 우울한지 모르겠다.
미치겠다.
그러는 바람에 사소한 일로 다투었다.
가출을 했다.
집을 나갈때는 아주 오랫동안 가출을해서 집안에서 내 존재를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막둥이가 밟히었다.
이놈이 불안해서 잠못들면 어떡하나.
다섯시간만에 돌아와보니 나와는 무관하게 잘들 자고 있었다.
눈이 펑펑내리는데.
2층 침대를 끄집어내고 그속으로 들어갔다.
1박 2일을 그속에서 누워 딩굴었다.
아줌마 커피의 향기로움도 모르겠다.
집안을 둘러보니 벽은 손때가 묻어 얼룩 얼룩하고
거실장은 문짝이 빠져 덜컹 덜컹 거리고 씽크대도 문짝이 하나 빠졌다.
침대는 푹 커져 있었다.
조율을 해도 해도 소리가 맞지 않은 피아노도 생각 났다.
휴~
집안은 가구들로 꽉 차 있어서 어지럽기 짝이없다.
추렁 추렁한 커튼들도 모두 칙칙했다.
화분에 꽃들로 활기가 없다.
저걸다 어떻게 손볼것인가.
무섭다.
요즘엔 남편의 팔자 타령이 더 심해졌다.
자기방이 너무 비좁아서 뭐가 어떻대나.
내 나이에 이게 무슨 팔자냐구.
꽤나 오랜 세월을 애들 공부 하나만을 봐보고 사느라고 이것 저것 생략 할것이 많았다.
볼것 몰볼것 가려가면서 필요한 것만 봐왔었다.
우리 남편도 애들에 대한 욕심이 많다.
더구나 아들을 실패하고 딸만 기르는 부모의 입장에서는 남들 열아들 못지않게 기르고
싶은 심정이 너무 크다.
그러나 너무 한곳으로만 비중을 두다보니 허한곳이 생겨날수밖에 없었다.
오늘 아침 우리 남편이 하는말
\"당신은 뭣땜에 살어 애들때문에 살잖어.\"......
내가 정말 뭤땜에 사는가?
애들때문에 사는가?
아니 나는 나 때문에 산다.
나를 위해서만 산다.
내가 이렇게 애들을 미친듯이 기르는것은 애가 잘되면 내가 좋기 때문이지
꼭 애를 위해서인것은 아니다.
애를 기르면서 부부가 같이 낳아 기르는데도 꼭 내가 데리고 들어온 새끼를 기르는것 같다.
자식들 수능 치루고 우울증이 온다더니 그게 내 꼴이 된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능도 안치뤘는데 이꼴이니 정말 수능을 치루고 나면 어떨는지......
이럴때는 훌쩍 떠나 새로운 환경을 접해보면 좋으련만 생활 공간이 너무 답답하다.
자꾸만 눈물이 났다.
우리 남편이 내딸을 들들 볶는다.
우리 남편은 언제부터인지 아내에게 불만이 생기면 큰딸을 달달 볶는 습관이 생겼다.
몇일전엔 우리 딸이 국화꽃 한 다발을 사왔다
편지속에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엄마 !는 언제나 엄마는 강한줄만 알았어요.\'
편지를 읽으면서 울고 또 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