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늙었다.
몸은 사십대라도 마음만은 청춘이라며
자부하며 살았는데
이젠 진짜 늙어간다.
어제 아침 눈을 떠보니
새벽 어느 시간에 소리없이 다녀갔는지
온세상이 하얀 이불을 덮고 있다.
어렸을적,
새벽잠이 없어
소피라도 볼요량으로 일찍 일어나
무심코 밖에 나오면
밤새 살풋이 내려 앉은 흰눈이
장독대며 돌담이며
앞집 초가 지붕이며
뜰방앞까지 한가득 쌓여
외투도 채 갖쳐 입지못하고 뛰쳐나와
아무도 지나간 흔적없는 골목길에
한발자욱 한발자욱
뽀드득 뽀드득 소리를 내며
볼이 벌겋게 얼도록 마냥 즐겁기만 했던 적도 있었는데......
남원에만 십팔센티가 왔다는데
거짓말같다.
어림잡아 이십센티는 훨씬 넘는것 같다.
아침부터 분주하게 눈을 쓸어내는
경비 아저씨들께
오늘 종일 내 음료인
녹차를 한잔씩 대접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바라본 단지내 정원은
참 아름답기만 하다.
어느핸가 잊고 있었던 친구가 보내온
연하장속에 있던 풍경이
그대로 옮겨와있는듯한
그런 모습이다.
또 산에 가고싶다.
눈내린날 산에 가면 또 다른 맛이 있다.
키작은 사철 푸른 나무 숲에서
이름모를 새들이 분주하게 수다를 떨고
팔랑팔랑 내린 눈은
내어깨위로
내모자위로
내 눈썹위로 스르륵 내려앉기도 한다.
그리고 물이 되기도 한다.
산에 가면 잊지말고 해야할일이 있다.
저만치 가다가 뒤를 돌아봐야 한다, 꼭.
열심히 오르느라 금방 스쳤던 그것들이
뒤에서 말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으니
어찌 인사없이 그냥 지나칠 수 있을것인가.
사는것도 그런것 같다.
쉼표없이 무조건 살다가도
한번씩은 허리 쭉펴고 서서
뒤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한해가 저무는 지금
그렇게하기에 딱 좋은 시기인것 같다.
내자신에게는 어떤 주인이였는지
내 이웃에게는 어떤 이웃이였는지
내아이에게는 어떤 엄마였었는지
헤아릴수 없이 많은것들이
나를 붙잡고 놓지않고 있다.
뽀드득 뽀드득
눈밟는 소리가 들리면
먼데서 그리운이가 찾아 올것만 같다는데
아름다운 풍광이
바라보기에도 아까운 오늘
내 그리운이가 불쑥 찾아와주었으면
정말 행복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