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 잘 어울리네..예뻐”
얘들 아빠는 같이 살 때 예쁘다는 말을 안 하고 살았다.
안한 이유는 내가 하도 도도해서 더 도도해 질까봐 안한다고 했다.
근데 요즘 한달에 한번정도 만나면 만날 때마다 예쁘다는 말을 한다.
오래 살고 볼일이다.
아들아이 생일이라고 밥한끼 먹자고 만났다.
저녁 먹고 서점으로 바로 출근을 해야 해서 새로산 까만 정장을 입고 나갔더니
잘 어울린다고 기분 나쁘지 않는 말을 했다.
진작 마누라 관리를 잘 하지.
교외로 나가 돼지갈비를 먹으려다나 내가 시간이 넉넉하지 않아서 가까운 곳에서 돈가스를 먹었다. 나와 아들아이는 돈가스를 시키고 애들 아빠는 물냉면을 시켰다.
돈가스 접시를 애들 아빠한테 가까이 밀며 같이 먹자고 했더니 기분이 좋은듯했다.
“생활비 오늘 조금 주고 다음에 마저 줄게.”
살 때도 언제 생활비 제대로 줬나...
올 들어 생활비를 정해 놓고 주기로 했는데, 몇 달 잘 주더니 8월 달부터 자꾸 밀려 준다.
달라고 독촉도 안했다. 왜 안주냐고 묻지도 않았다.
언제는 돈이 널널해서 살았나.
같이 살 때 생활비는 자꾸 깎아내리면서도 술집은 고급으로 드나들었다.
어떤날은 엉겁결에 술값이 생활비보다 더 비싼 곳에 갔다 왔다고 자랑을 했다.
그런날은 내가 소리를 지르는 날이된다.
소리를 지르다가 결국은 울게 된다.
너 같은 인간이랑 결혼한 것도 내 팔자지.
서점으로 출근하는 시간이 한시간정도 남아돌았다.
시내 쪽을 벗어나니 텃밭이 보인다.
“텃밭 구경이나 할까?”
애들 아빠는 내가 노후에 시골 가서 살자고 하면 당신이나 가서 살라고 했다.
자기 자신은 시골은 삭막해서 싫다고 했다.
근데 텃밭 구경을 하자고 차를 세운다.
진짜 오래 살다보니 세상도 변하고 사람도 변하는구나.
밭길로 따라 들어갔다.
무 잎이 나뭇잎처럼 무성하다.
고추가 익어 붉게 말라갔다.
가지는 잎만 커다랗지 열매는 끝났다.
들깨 냄새가 나서 보니 깻단이 머리를 맞대고 서 있다.
보라색 들꽃이 피어 있었다.
“꽃이 피었네..이름이 뭐지?”
처음으로 들꽃에 관심이 있어 내게 물어보는데..나도 모르는 꽃이다.
알고 있는 꽃이름을 물어볼 것이지 눈치는 여전히 발바닥이네.
어떤 텃밭에 무시무시한 푯말이 써 있었다.
“독한 농약을 쳤으니 먹으면 큰일 납니다.”
밭주인이 애써 지어 논 농사를 훔쳐갈까봐 그랬나보다.
“안 먹는다, 안 먹어.”
나는 웃느라고 한 말인데, 밭주인이 들었다.
“시팔~~년놈들이 다 캐가요. 미친년들 남의 것 도둑질해가서 먹으면 소화가 되나, 씨팔년들”
아따..그 아줌마 욕한번 신나게 하네.
밭가장자리에 가로수가 있었다.
성장 속도가 엄청 빠르다는 씨크라멘타인지...이름 모름, 그 나무다.
가로수 길 가운데를 걸었다.
콩잎이 갈색으로 말라가고 있었다.
옥수수는 벌써 죽었다.
바랭이 씨앗에 가을이 머물고 있다.
저녁이 가을빛에 서늘하다.
개 한 마리가 나무에 묶여져 있다.
주인을 따라 밭에 나왔나보다.
아들아이가 다가가 쓰다듬어 주니 기분좋다고 꼬리를 흔들어준다.
개 주인이 저만큼에서 우리를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가을 하루가 저물어가네.
뒤돌아 왔던 길로 다시 걸었다.
얘들 아빠와 밭두렁 길을 걸었던 적이 있던가?
아이들 어릴 적에 두어 번 간적 있었나?
시간을 너무 많이 소비해 옛일이 가물거린다.
별거와 이혼을 합쳐서 칠년...
길기도 길다. 세월이 무심하게 강처럼 흘러갔네.
나를 내려주고 애들 아빠는 아들아이와 찜질방 간다고 갔다.
일 끝나고 퇴근하려고 했더니 전화가 왔다.
찜질 방에서 나왔다고 집에 데려다 준다고 나오라고 한다.
덕분에 편하게 집에 가겠네.
말끔한 아들아이만 쳐다본다.
애들 아빠랑은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
애들 아빠는 날 흘끔흘끔 쳐다보지만 난 외면을 한다.
이제 다 끝난 남녀사이인데 봐서 뭐하겠나...
배고프다고 해서 마침 세일한 빵을 사가지고 온 게 있어서 먹으라고 주었다.
아들아이와 같이 먹는다.
“마실 거는 없는데.." 목이 마를 것 같아서 내가 한마디 했다.
“됐어..목마르면 가면서 사 먹지.”
그래 각자 알아서 사는 거지...
부부는 헤어지면 남보다 못하다더니 우리가 그 짝이다.
가을 밤 바람이 차다.
아들아이는 아빠가 안보일 때까지 가을바람에 나뭇잎처럼 손을 흔든다.
뒤엉켜 흩어지는 낙엽이 만남과 헤어짐의 계절을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