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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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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주렁주렁


BY 개망초꽃 2005-09-21

명절날 동생들과 올케와 아이들과 점심을 먹고 뜰이 있는 곳으로 갔다.

거닌곳은 초가집을 그대로 복구한 곳이다.

일산 전원주택가에 있는 그곳은 한적하고 한가로운 오후 햇살이

뜰마다 담뿍 담뿍 가을걷이를 하고 있었다.

들어가는 입구엔 밤나무가 밤송이를 가지마다 주렁주렁 달고,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는 예쁘다더니, 밤나무가 그랬다.

털을 잔뜩 세운 새끼들을 예뻐죽겠다며 우리에게 자랑하고 있었다.

계단을 올라 나무대문을 지나니 너른 마당이 나왔다.

화살나무 잎엔 어미진드기가 새끼 진드기를 보호하려고

우릴 보더니 엉덩이를 치켜세워 경계의 표시를 했다.

감나무가 서너 그루 있었는데 아직은 덜 익은 연두색감이  주렁거렸고,

대추는 높게 달려서 우릴 내려다보고 있었다.

배불뚝이 장독대 뒤로 기와 담장이 야트막하게 둘러쳐져 있고

담장 아래엔 미국쑥부쟁이꽃이 몸을 앞으로 숙이고 

우리들이 들어오는 입구쪽을 내다보고 있었다.

이름모를 나뭇잎은 가을빛이 벌써 머물러 짙은 분홍색으로 갈아 입고,

모과나무에도 모가난 열매 여럿이 엄마허리춤을 힘껏 잡고 있었다.

가까운 곳에만 나와도 가을은 빛을 품어 하늘을 향하고 땅을 내려다보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나보다.


막내동생은 마당에 깔린 흙을 보며 모래가 섞이고 잔돌이 섞여서 물 빠짐이 좋아 비가와도 질척이지 않는다고 했다. 발바닥에 밟히는 모래흙이 까슬거리고 뽀송하다.

우리 형제들은 이런 정원을 머릿속에 항상 넣고 다닌다.

유실수는 마당가운데 심지 말고 집 가장자리로 심고,

꽃은 누나가 좋아하는 들꽃을 맘대로 심고,

집은 삼층으로 짓고, 세 가족이 한 층씩 살면 되고...

그러니까 형은 얼른 장가를 가야 되지 않느냐고 막내동생이 덧붙이고...


내겐 남동생만 둘이다.

큰 동생은 나보다 두 살이 어려 마흔세 살인데 아직도 결혼을 안했다.

막내동생은 앞차가 안가면 내가 먼저 질러가야지 하며 결혼을 해서

자기랑 똑같이 생긴 일곱 살 된 계집아이를 낳았다.

큰 동생은 인물도 유별나게 좋고 직장도 비나 눈이 와도 끄덕 없는 공무원인데

이상하게도 결혼을 안 하고 자유로움을 만끽하며 살고 있다.

왜 결혼을 안 하냐고 물으면 독신주의자라나 뭐라나 하면서 분명치 않은 이유를 대며 듣기 싫어한다. 그러면서 사귀는 여자는 있으니 이상하긴 많이 이상하다.

그래 결혼이란 것이 나를 보더라도 그리 강요할 것도 아니니 더 이상 할말은 없다.

막내동생은 무일푼으로 결혼을 해서 지금은 분당에 집 장만을 해서 잘 살고 있다.

올 명절 땐 빌딩을 사고 싶다고 술에 취해 술에 취한 나와 떠들었다.

“누나? 사는 것이 별거 아니야. 내가 빌딩을 사고 싶기는 한데 한편으론 그거 사면 앞으로 십년도 더 빚갚을려고 엄청 고생해야할것같아.”
“ 그래 빌딩을 네가 사고 싶다고 해서 너한테 주어지지 않아. 그러니까 그냥 편하게 살어.

네 팔자에 빌딩이 있으면 언제든지 너한테 올거야.”

“그건 그래...누나도 너무 앞서 걱정하지 말고, 즐겁게 살아.

내일은 우리가 어떻게 될지 몰라..그게 인생이드라고...”

막내동생과 나는 추석전날 새벽까지 술을 마시며 한치 앞도 모르는 인생 이야기를

술잔을 주고 받듯이 주거니 받거니 했다.

딸아이가 엄마가 좋아하는 가요을 크게 틀어주어서 기분이 달처럼 휘황하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가을 밤바람처럼 삼삼했다.

 

초가집은 일산이 처음으로 신도시로 개발을 할 당시에도 집주인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미음자형 주거방식이었는데, 마당을 중심으로 네모난 형태로 지어진 아주 특별한 초가집이라서 없애지 않고, 일산시에서 매입을 하고 단장을 해서 일산주민들에게 공짜로 보여 주었었다. 초가집은 작고 초라하고 네모난 마당은 정원도 꾸밀 수 없을 만큼 좁고 습하고 응달져 있다. 나는 몇년전에 초가집 안에 들어가 봤고, 동생들과는 이번에 처음으로 와 보게 되었다.

너른 마당을 지나면 초가집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오는데 

입구엔 해바라기 꽃이 시들시들 고개를 숙이고,

통나무 울타리엔 며느리밑씻개가 열매를 잔뜩 맺고 있는  모습이 초라했지만

썩어가는 울타리와 그럭저럭 어울려 살고 있었다.

나는 초가집으로 들어가 네모난 마당에서 네모난 가을하늘을 올려다보고 싶었는데,

낡아진 대문엔 '지금은 수리중'이라는 안내장이 걸려 있어서

우리의 발길은 아쉬움을 두고 되돌아 와야만 했다.


초가집을 뒤로하고 다시 내려온 너른 마당가엔  얕트막한 밤나무가 있었다.

밤나무 밑엔 밤따기 좋은 나무막대기가 놓여 있었고,

 바닥에는 누군가가 이미 따내려 깐 빈 송이가 널브러져 있었다.

풋밤의 고소한 맛을 알고 있던 큰 동생이 막대기를 들어 밤송이를 떨어트렸다.

막내동생은 밤나무 아래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밤송이 하나를 발견해서 까고 있던중었는데

큰 동생이 떨어뜨린 밤송이 하나가 막내동생 얼굴을 때리며 굴러갔다.

"아얏~~밤송이를 왜 나한테 맞춰서 떨어뜨리는 거여어~~?“

“네가 딱 맞게 서 있었네. 하하하”

올케는 달려가 동생얼굴에 박힌 가시를 빼주고

휴지가 없어서 가방에서 양말을 꺼내 닦아주면서

“어제 하루 종일 신었던 양말인데, 으헤헤헤”했다.

밤송이를 떨어뜨린 큰 동생이 미안해서 웃기 시작해

밤송이를 맞고 피를 본 막내동생이 웃었다

신던 양말로 남편을 닦아준 올케도 웃고

일곱 살 난 조카도 뭐가 웃긴지 웃었다.

그 장면을 그대로 본 나도 손뼉을 치며 웃고

짧은 청치마를 입은 딸아이도 웃고

파란 조끼를 입은 아들아이도 오랜만에 밝게 웃었다.

미국쑥부쟁이 꽃이 하얗게 웃고

열매를 달고 있던 나무들도 주렁주렁 웃었고

풀들을 흔들고 가던 바람도 웃고

푸르고 맑은 가을 하늘도 웃었다.

초가집 앞마당에 있던 모든 것들이 온 몸을 흔들어 대며 웃었다.


가을은 이제 우리들 가슴에 한자리를 차지하고

진흙이 떨어지듯 나뭇잎은 땅바닥에 철퍼덕 떨어질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