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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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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꿈에...


BY 은하수 2005-08-30

졸업하고 20년 세월이 흐른 시점에 모교인 고등학교에서 전화가 왔다.

시험 공부를 다시 하라고 했다. 대학 입시 공부를... 적성에 맞는 과를 다시 가야 한단다.

뭔 놈의 대학을 다시 가라고... 나 참. 그러나 것두 유행이었는지 아무튼 그래야 할 것 같아

썩 내켜하진 않으면서도 고분고분 시골의 옛 고등학교에 다시 입학했다.

고삼으로 되돌아간 늙다리 학생인 나... 끝내 몇일 못 가서

또다시 입시 안 보겠다고 다시 대학 입학 안 하겠다고 시위성 결석에 들어가고 말았다.

학교에서 또다시 전화가 온다. 나와서 시험 공부하라구... 난 안 한다고 버티구...

 

안 끌려가려고 승강이하며 무진 용을 썼다.

왜 또 가... 갔다 왔는데.. 안 가... 필요 없어...

그러다가 그 지겨운 꿈에서 벗어났다. 휴우 하며 안도의 숨을 내쉬는 한편으로

아직까지도 고삼과 입시의 옥죄던 기억에서 벗어 나질 못했나 싶어 나 자신이 한심했다.

예전부터 내일이  전범위 수학 시험인데 공부를 하나도 안 해 전전긍긍 가슴 졸이는 꿈은 가끔 꾸었었지만 이번엔 전혀 새로운 스토리라 참신한 맛이 있긴 했다.

 

꿈 속에서 난 왜 바로 거절하질 못하고 대학 한번 더 가겠다고 욕심을 내었을까.

내가 욕심이 많아서일까.

내 성격이 우유부단해서일까.

아직도 그 시절의 엄한 분위기에 짓눌려 살고 있는 걸까.

아님 나도 모를 내 속마음이 전공을 맘에 안 들어하고 있었을까.

휴일동안 남편과의 소득도 없는 입씨름으로 인한 마음의 피폐함 내지는

또 한주가 시작된다는 스트레스가 꿈 속에서 입시 스트레스로 전이된 것일까.
 

첨엔 다른 전공의 과를 택하여 대학을 다시 가자는 말에 솔깃해 했다가

다가올 어려움이 눈 앞에 보이는 듯이 지긋지긋해져서 과감히 포기하였다라는 내용에서

더이상 외부 권위에 굽히지 않고 표피적인 것에 가치를 두지 않겠다는

내뜻을 관철하려는 귀한 고집이 살아난 듯 하여 그리고

평소 뚝심이라 불리기도 하는 끈덕진 일면에 비하면 산뜻하고 현명한 판단이라고 느껴져 

스스로 기특한 맘이 들기도 하였다.

 

불과 1-2년 전만 해도 왠만한 꿈은 개꿈이라고 치부하고 가볍게 웃어 넘기며 잊곤 했었다.

하지만 나 자신의 심지 하나만 믿고 시작했던 일이

당초의 내 의도나 예상과는 상관없이 전혀 예기치 못한 다른 방향에서 꼬여들어가

혼이 난 뒤에는 나 자신을 어디까지 신뢰해야 할지가 의문이었다.

신이라는 말도 신명이라는 말도 떠올려 보게 되었다.

신의 의지가 나의 의지를 무릎 꿇리고 있었고 고개를 꺾어 땅을 보게 하였다.

그때껏 꽤 견고한 것이리라 믿어 의심치 않던 나의 의지나 다짐들이 

순간적으로 물거품같이 사라지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을 보고

사람의 그것이 참 별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살고자 하는 욕구의 또다른 표현일 뿐임을...

정신의 나약함은 껍데기 육체의 한계와 정확하게 일치하였다. 정신도 육체를 태워야 밝힐 수 있는 촛불이었다.

건강이 위협받고 있다는 육체의 신호를 감지했을 때는 오직 살아야겠다는 일념 외에는 모두 깨끗이 사라져 버림을 난 보았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 남았던 누군가가 그랬다지

신의 뜻(우주의 섭리)이란 대지를 적시는 강물의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흐름과도 같고

인간의 뜻(자유의지)이란 그 흐름에 역행해 한 번쯤 강바닥을 굴러 보려는 돌맹이의 그것이라고...

어쩌면 그 자유의지라는 것 조차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신의 뜻이 아닐까?

꿈이란... 돌멩이에게 주는 강물의 자그마한 선물인지도 모른다.

 

어이없게도 증발해 버린 나의 자유의지를 생각하면서

어떻게든 신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며 거기 맞춰 살려고 노력해야지

남은 생을 그나마도 평탄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보너스까지 바란다면 안되겠지.

 

난 평소엔 꿈을 잘 꾸지 않는 편이다.

비교적 쉽게 잠이 드는 편이며 한번 잠들면 그 길로 내리 아침까지 푹 자는 편인데...

아침 일찍 설핏 잠이 깬다 해도 금방 헤어나오지 못하고 잠에 취해서

삼십분 간격으로 시계를 봐가면서도 선뜻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를 못한다.
한동안 잠 속에서 미적거리기 일쑤다.

물론 낮에 해결 못본 일이 있었거나 비맞은중 모양 혼자 속앓이를 했다거나 하면

신새벽부터 잠이 깨어 말똥망똥할 때도 국경일 돌아오는만큼 가끔은 있다.

 

간밤에 꿈자리가 어땠는데 오늘 어쩌구 내지는 길몽이네 흉몽이네 하면서

옛 사람들은 꿈을 곧 다가올 미래나 현 상황에 대한 암시로 여겼고 이를

복(행운)으로 누리거나 환난으로부터 모면하기 위한 일기예보용 더듬이로 삼았었다.

 

우리는 자면서 꿈을 꾸고 그 꿈을 되새김질해 보면서

예측 불가한 미래를 점쳐 보려고도 하고

가늠이 안 되는 모호한 현실을 나름으로 풀이해 돌파해 보고자 함으로써

신의 영역을 손톱에 티끌만큼 들다보고 싶어하는지도 모르겠다.

신의 피조물이기에 우리는 

꿈이란 막연함에 대해 

어두운 밤바다를 밝히는 등대나

먼 초행길에 길을 보여주는 내비게이터 같은 역활을 부여하려는 것인지 모른다.
 
꿈보다 해몽이라구...

간밤에 꿈을 꾸고 나서 느낀 것은

 

내가 나도 모르게 부리는 욕심이 꿈에 그런 식으로 표현된 것이리라.

뚜렷한 야심도 없이 남이 한다니까 나두 하는 식의 아무 쓸데 없는 욕심을...

나만의 주관이, 줏대가 있어야 나중에 후회가 없고 원망이 없을 것이다.

다음번 꿈에 전화 오면

제가 좀 바쁘거든요? 하고 단번에 끊어야지.

 

남편과의 관계에서도 피해의식으로 너무 날을 세우지 말자.

설사 피해를 입고 살더라도.

지복이고 내복인걸 어쩌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