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이 글에서의 40대 직장 여성과 MZ직원과의 싸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390

먹는 모임 2


BY 은하수 2005-08-23

주말에 가족 모임을 집에서 가졌다.

시어머니생신 때 만나고 오랜 만에 모이게 되었다.

봄에 이사를 하였기에 미루어 왔던 집들이를 추석을 앞두고서 하게 되었다.

다들 이곳저곳 흩어져 살고 명절에나 시댁에서 만나기에(살기 바빠서) 모처럼 손님을 치게 되어 신경이 쓰였다.

이제 정말 신혼도 아니고 먹는 행위를 아주 중요시 여기는 시어머님 방식에 익숙한 탓에 몇주 전부터 메뉴를 무엇으로 정할지

고민이 되어 손님초대 요리책까지 사서 보았다.

바쁘단 핑계로 다른 집 주부들이 하는 일을 피해 갈 수 없다면 오히려 잘해서 뻐겨보고 싶은 마음이 왠지 들었다.

맏며느리지만 음식 못한다는 낙인이 찍혀 명절에도 과일 깎기가 주된 책임이고 설겆이가 특기였다. 쉬운 잡채도 동서만 시키셨다.

음식을 못하면 부뚜막 세계에서는 인기가 없다는걸 느껴왔던 터라 이번 기회에 나 혼자도 잘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다.

지난번 생신때 낙지 볶음과 빈대떡으로 모두를 감동시키는 좋은 반응을 얻었었지만 이번 기회에 확실한 이미지 굳히기를 할 필요가 있었다.

먼저 메뉴를 정하는 일이었다. 시간도 촉박한데다 모험을 하기엔 상대가 상대인지라 아무래도 손이 덜 가면서 맛은 어느정도 보장되는 <비장의 무기>로 결론을 보았다.

모임 전날 장을 보아서 들어가니 저녁밥이 하기 싫어 식구들 모두 분식집으로 가서 만두, 찐빵을 먹었다. 요리선생들 정작 집에서는 잘 안해 먹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 재워 놓고 남편은 복잡한 책방를 깨끗이 정리하기로 하고 난 음식할 재료를 씻고 다듬고 양념에 재우는 일을 시작하였다.

20개 정도 되는 닭다리를 살만 바르고 있자니 닭백정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낙지를 내장을 따고 소금 문지르고 씻어서 양념한 뒤에 갈비를 재우는 일을 했다.

황태를 물에 불려 양념해 두고 단호박을 삶았다. 요리책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서 하자니 새벽 3시반이 넘어서야 마무리가 되었다.


이튿날 오후 4시쯤 남편은 역으로 손님들을 마중 나가고 나는 단호박 경단을 만들어 카스테라가루에 굴리고 영양부추를 무쳤다. 황백 계란지단도 부치고 

당근지단을 볶고 미나리와 청포묵을 데쳐 두었다.

5시 넘어 손님들이 들이닥쳐서 두 동서들과 힘을 합쳐서 마지막 조리에 들어갔다. 내가 준비한 것에 동서들도 놀라는 눈치였다.

그렇게 해서 이름도 낯선 갈낙새 전골, 닭고기 볶음, 황태 구이, 탕평채, 부추무침, 오이지무침, 묵은지김치를 두 상씩 차려 내었다.

다들 아주 맛있게 먹어 주어서 기분이 좋았다. 감동의 도가니탕이었다.

어머닌 밥이 적다고 불평을 하셨지만 밥이 비는 속도와 반찬접시 비는 속도가 거의 비슷하여 양 면에서도 알맞았다. 난 남기는 것 질색이니까.

맛있는 식사 뒤에는 기분좋은 포만감이 있어야지 숨도 못쉴 정도의 압박감은 구시대의 유물인 것이다.

상을 물리고 세 동서가 설겆이를 하고 나서 후식상을 차렸다.

맥주와 아이들을 위한 매실주스, 과일, 마른 안주, 회심의 단호박 경단이 나갔다.

단호박 경단으로 다들 또 한번 감탄하는 분위기에서 엄마보담 내가 더 요리를 잘하는 것 같다는 조카딸의 말에 깨끗한 한판승을 거두었다.

아이들의 재롱잔치를 보다가 모두 잠자리를 봐서 자러가고 마루에서 자는 팀과 영화를 보다가 너무 졸려서 먼저 잤다. 그럴만도 하지.


다음날 아침 7시 반쯤 일어나 두 동서들과 쇠고기 버섯전골, 해물 굴소스볶음, 홍합 야채샐러드를 만들어서 아침을 먹었다.

또한번 감탄의 물결~~ 그동안 얼마나 못 하였길래 푸훗~

커피와 과일과 나의 단호박 경단으로 깨끗한 마무리를 지었다. 조카딸은 단호박 경단을 꾸역꾸역 말없이 먹는데 우리집 녀석들은 본척 만척이다.

먹어본 놈이 맛을 안다구... 촌시런 놈들...

나와서 집 주변의 편의시설과 수목 우거진 공원을 둘러 보고 아이들이 줄넘기를 하고 숙모들은 줄을 돌리고 디카로 동영상을 찍고 모두 즐거운 시간이었다.

모처럼 햇살이 따가왔지만 너무 청명하여 마음속의 안개까지 거두어내는듯 했다.

조금 더 놀아도 되는 시간에 시어머니 점심 먹자고 서두르셔서 평소 점찍어둔 수제비집에를 갔다. 아이들은 숙모와 치킨집에 갔다.

어른끼리 수제비와 파전과 동동주를 먹었다. 건배를 외치며 마신 동동주가 시원하니 맛있었다.

점심을 마치고 주차장에서 이별을 하였는데 여느 명절에 차례를 지내고 헤어질때와는 뭔가 다른  무사히 임무를 수행한 자의 안도랄까 암튼 순수한 기쁨과 만족감과 개운함이 있었다. 다들 활짝 웃으면서 진심에서 우러난 인사를 나누고 헤어져 갔다.

다음번 가족 모임에는 어떤 걸 해서 사람들을 놀래켜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