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 이거 버려도 되죠?"
시어머니 제사에 참석하러 온 동서가 씽크대를 온통 뒤집어 놓으면서 꺼내놓은 그릇을 버릴 것과 남겨둘 것을 두 군데로 분리를 하다가 금테 두른 커피 잔을 들고 나한테 물어왔다.
버리자니 아깝고 꾸중들을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다시 집어넣으려니까 왠지 뒤지고 낡았다는 생각에 판단이 안 섰나 보다.
내가 결혼할 때 친구가 비싸다고 엄살 떨면서 사준 부부세트인데 한 개는 깨져서 버렸지만 나머지 한 개는 아직은 쓸만해서 가끔씩 사용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신세대 동서 눈에는 그게 전에부터 맘에 걸렸는지 올 때마다 버리라고 종용을 했지만 말짱하다는 핑게로 씽크대 중앙에 떡 허니 얹어놓고 썼는데 이번에 피해갈 수 없을 것 같다.
버리면 좋은 걸로 사준다고 나를 꼬드겼지만 왠지 선뜻 안 버리게 되는 나를 보고 너무 묵은 티내며 살지 말라고 은근히 나무라기도 했다.
마땅한 대답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있는 내 눈앞에서 과감하게 손잡이를 깨어 버렸다.
이렇게 해야 다시는 미련을 안 가진대나 .........
서운하고 아까웠지만 바닥에 약간의 실 금이 간 걸로 위안을 삼았다.
머지 않아서 새 커피 잔이 부쳐 올 거지만...........
동서가 꺼내놓고 분리한 것 중에는 버릴게 훨씬 더 많아서 조금은 민망하고 부끄럽기까지 했다.
때가 끼인 것도 있었고 나도 모르게 이빨이 빠진 밥 주발도 구석에 쳐 박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손이 닿지 않는 구석엔 기억에도 없는 유리그릇이 박살이 난 채로 흩어져 있었다
코팅이 벗겨져서 볼품 사나운 후라이팬을 몽땅 쓰레기통에 갖다 버린 동서가 반들거리는 새것으로 사서 부쳐온 게 불과 얼마 되지 않는데 아직도 동서의 레이다망에 걸린 게 부지기수인 모양이다.
주섬주섬 손끝에 딸려 나오는 폐기물(?)들을 보는 동서의 얄궂은 표정을 보니 그동안 내가 생각없이 살았는 것 같아서 얼굴이 화끈 거렸다.
내가 차마 버리지 못하는 건 자기 손으로 버리고 새것으로 바꾸어주는 게 너무 이쁘고 고맙다보니 더 버릴 수가 없는 염치를 아직은 가지고 있어야 했다.
"형님, 요즘 싸고 좋은 게 얼마나 많은데 이렇게 케케묵은 거 끼고 사세요?.이젠 좀 산뜻하게 사세요 제발.."
알뜰하고 깔끔한 동서는 나의 구질구질한 살림만 보면 버리라고 했다.
나도 그리 추하거나 허술하게 산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동서가 나보다 한 수 위였다.
"형님 제가 가고 난 뒤에 혹시라도 안 보이는 게 있으면 더 이상 찾지 마세요..없을 테니까.."
쓰레기통으로 한 보따리 갖고 나가는 걸 보니 뭔가를 놓친것 같은 허전함이 드는건 묵은 정을 떠나 보내는 눅눅한 감정이 한귀퉁이 뭉쳐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어머님이 살아 계실 때 내가 했던 행동을 동서가 고스란히 받아서 하는 게 신기했다.
시어머님이 사시는 집에 들락거리다 보니 눈에 거슬리는 살림살이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솜이 비죽이 튀어나온 이불을 그대로 덮고 잘려니까 몸이 근질거려서 자다가 일어나서 꿰맨 적도 있었고 옻칠이 벗겨지고 한쪽 귀퉁이가 약간 떨어져 나간 나무 밥상은 그대로 다리를 분질러서 소각하는데 던져 버렸다가 호되게 꾸중을 듣기도 했다..
참으로 깔끔하신 시어머니였는데 연세가 드니까 모든 게 귀찮고 번거러워서 대충 사시는 것 같아서 마음이 짠하기도 했다.
눈에 보이는 게 모두 쓰레기 같아서 아주 못 쓸 것 같은 물건을 허락 없이 쓰레기통에 버렸다가 나중에 닦달을 당했고, 엄청나게 꾸중들을 것 같은 일에는 오리발을 내 밀었는데 심증은 가나 물증이 없어서 당신 혼자서 혀를 차기도 했다.
밖에 갖다가 놓아도 누구하나 집어 갈 만큼 탐나는 살림도 아니었고 값으로 환산하려고 해도 견적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낡고 보잘 것 없는 살림이지만 수 십 년 손때묻은 살림을 묵었다는 이유 하나로 쉽게 버리려는 나를 이해하시기보다는 헤프다는 소리로 내 행동에 브레이크를 거셨다.
"야야..이건 쬐매만 더 쓰자...아직은 쓸만한데 뭐..."
손잡이가 떨어져 나가서 번번이 행주로 몸을 감싸야 불에서 들어낼 수 있는 냄비를 다시 줏어다 놓고는 민망해서 하신 말씀이었다.
시할머니가 반세기 전에 쓰신 사돈지를 모르고 버렸다가 난리가 났었다.
이건 내가 이실직고를 해야 할 사항이어서 실토를 했다가 따블로 욕을 먹었다.
다행이 물에 젖은 탓에 글씨가 풀어져 두엄더미에 얹혀 있어서 되찾았지만 칼끝같은 시어머니의 그 꾸지람은 두고두고 머리에 박힌 채 남아 있었다.
' 너 때문에 이집에 남아 나는 게 없다. 우리 늙은이도 갖다 버릴래?'
한기가 뻗힌 시어머님의 타박을 듣고 난 뒤에도 여전히 버리는데 게으르지 않았던 나의 그 심사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던 부분이다.
살림 반 이상을 거덜내고 온 뒤 일 주일 후에 가보면 내 눈을 피해서 되 찾아온 게 구석구석 눈에 띄었다.
웬만한 건 그냥 못 본 척 했지만 버려야 할 것은 기어코 버리고 새것으로 바꾸어 드려야 직성이 풀린 그 고집을 은연중에 동서가 대물림을 하고 있었다.
반들거리는 새 것 보다도 망가지고 헤어진 것에 대한 아련한 추억과 끈끈한 정이 시럽같이 달라 붙어서 쉬이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불편하거나 낡았다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손에도 몸에도 익숙해 져 있는 살림을 버리는 내맘도 그리 산뜻 하지만은 않았다.
그냥 쓰시도록 버려 두어도 될 일이지만 남아 있는 삶에 조금이라도 신바람 나게 해 드리고 싶은 맘이 생긴게 그 이유였고 나 혼자만 좋은것을 쓴다는게 미안하고 죄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대신에 반들거리는 새것으로 교체를 해 드렸지만 왠지 더 불편하고 낯이 설어서 선뜻 사용하기가 쉽지 않다고 하셨다.
시어머니는 편리한 것보다는 편한걸 더 원하셨다는 걸 동서가 내 살림 거덜 낼 때 느꼈다.
새것만이 꼭 좋은 건 아니라고......남의 옷 입고 나들이 하는 것 같은 어색함에 쉽게 쓰게 안되더라고 얘길 했더니 동서는 자지러지게 웃는다.
"아이고..울 형님 이젠 시엄니 닮아 가시네유.............."
내가 어느새 버려야 할 게 많은 싯점에 와 있나보다.
버려줄 때는 그 훗날의 나를 안중에 두지 않았었다.
나에게는 아무도 버리라고 하지 않을 줄 알았고 난 버릴게 없이 살 줄 알았던 착각으로 인해서 살아갈수록 버릴게 비례해서 늘어났다.
아끼고, 아까워서 끼고 살다보니 내 주변은 포화상태로 터질 듯이 팽팽하다.
멀쩡하다는 이유 하나로 오래도록 한가지만 고집하는 외?凉層?원치 않았고 눈알 돌아가는 소리가 사방에서 비명처럼 터지는데 한군데서 안주하는 안일함도 버린 채 살고 싶다.
때로는 과감하게 때로는 유연하게 삶의 리듬을 타야 된다는 건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출발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옛것에 대한 향수라는 그럴듯한 포장 떼어 버리고 많이 가지고자 하는 욕심이 더 앞섰기 때문이라고 솔직해지고 싶기도 했다.
예전엔 생활 도구로 혹은 생활필수품으로 사용해 왔던 것들이 거실 한켠에서 고가(高價)의 장식품으로 둔갑하고 있는 현실을 보니 세월이 너무나 많은것을 씻어 버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돈만 많으면 천국이라고들 했다.
그래서 더 쉽게 버리고 쉽게 취해지는 편리함에 이미 길 들여진 세대앞에서 옛것에 대한 추억이나 향수를 가지고 묵은 얘기 끄집어 내면 외면들 한다.
이렇게 편한 시대에 살면서 지지리도 궁상맞게 군다고 핀잔 들을 게 뻔하지만 어렵게 살았던 그 아픈 시대를 한번쯤 재생 시켜 보는것도 나쁘진 않을것 같다.
좋고 편한 것에 길 들여지다보니 불편함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없는 게 요즘 사람들이다.
불편함에 대해서 이미 내성이 생겨버린 우리의 어른들은 걸핏하면 불편해서 못산다는 아랫세대를 보면 가슴이 답답하다고 했다.
삶의 불편함을 일종의 삶의 장애라고 느낄까봐 두려워지는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