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에 내가 사업인지 뭔지 땜에 아픈 바람에
휴가고 뭣이고 다 물 건너 갔더랬는데
올 여름엔 휴가를 제대로 찾아 먹을 수 있어서 감회가 남달랐다.
작년여름에... 아! 휴가를 가긴 갔더랬지... 마음으로의 여행... ㅋㅋㅋ
그 와중에도 휴가를 못 간다는 사실이 그렇게 원통할 수 없었다. 우째 이런 일이... 흑흑
모처럼 천금같은 휴가를 받아 놓으니 첫날 아이 녀석이 열이 닷새째라 망설여졌는데
약간 수긋해지는 것 같아 동네병원 다녀오는 일로 께름함을 덜고 출발을 강행하기로 했다.
된장 고추장 야채 감자 김치 두부 계란 쌀... 세면 도구... 속옷... 수영도구... 목감기약...
윗옷도 두벌씩 챙겼다.
옥색 잭앤질 민소매 티... 남색 라코스테 납작 운동화...를 가져가기로 했다.
작년에 끼니도 제대로 못 끓여 먹는 날 두고 시어머니가 아이들을 데리고 시골로 내려가실때
배웅을 하고 기차역 백화점에서 산 것들이다.
참담한 기분으로 홧김에 샀던 물건들이 이제는 간만의 내 여행에 어엿한 동반자가 된다.
낮은 목소리로 속삭여본다... 그동안 내가 잘 해낸 거야... 슬픔이 축축이 묻은 물건들에게 인사를 건네본다... 그동안 힘들었지? 애썼다...
중얼거림도 잠시 우리는 짐을 주섬주섬 대충대충 어영부영 싸서 차에 싣고서야 겨우겨우 출발할 수 있었다.
지리산으로 가자~~ 야호
오후 4시가 다 되어 출발한 데다 휴게소에서도 느긋하게 논 관계로 11시쯤에야 지리산 온천지역에 있는 한 콘도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콘도 앞 뜰 한 구석에서는 옛날에 죽은 김광석이 열창를 하고 있는 라이브 맥주카페가 아직도 열리고 있었다.
아이들을 재우고 고김광석의 애절한 목소리에 이끌려서 생음악과 맥주잔 부딪는 소리를 따라서 의기양양 자리를 잡은 시간이 밤 12시... 맥주와 노가리 안주와 통기타 가수가 나름 멋부려 부르는 7-80년대 흘러간 가요는 지리산의 밤공기 속에서 휴가 첫날의 들뜬 마음을 가만히 가라앉혀 주었다.
둘째날 화창한 아침 햇살과 상쾌한 산공기에 달콤한 잠을 깨우고 김치찌개와 밥을 해 먹고 차를 타고 지리산 노고단으로 올라갔다. 도중에
시암재에서 한참 쉬고 삼천원하는 향나무 베갯속도 사고 목도 축였다. 날씨는 햇살이 눈부실 정도로 쨍쨍하고 더웠으나 얼른 그늘에 들어서면 산들바람이 땀을 식혀주었다.
성삼재에서 차를 주차하고는 이제부터 걸어서 노고단 대피소까지 가야 했는데 우동과 파전을 사먹고 기세좋게 출발은 하였으나 전날까지 앓았던 아이가 울면서 내려가기를 고집하는 바람에 나의 노고단 정복은 기약없는 다음 기회로 연기되고 큰 아이와 남푠만 올려 보내고 삼분지 일 정도 간 지점에서 아쉽게 내려와야 했다.
하지만 산행길 입구에서부터 길가에는 군데군데 밝은 오렌지빛 원추리꽃이 무리를 지어 한창 소담스러이 피어나고 있어 그 싱그러움이 내게도 전해지는 것 같아 오랜동안 눈을 떼지 못하였다.
이 외에도 흰 까치 수영꽃?, 연보라빛 무릇꽃?, 진주황빛 꽃잎에 까만 점무늬가 돋아난 나리꽃, 그 밖에 이름도 다 알 수가 없는 하얗거나 노랗거나 연한 보랏빛의 조그만 산꽃들이 반가이 인사를 해 왔지만 이름을 제대로 불러줄 수가 없어서 안타까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