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무렵부터 비가 오기 시작했나봐. 버스를 타려고 밖엘 나오니 바닥이 젖어 있더라. 비는 그쳐 있어서 다행이다 했지.
버스에서 내리려하니 비는 다시 내리기 시작하더군. 창문에 사선으로 비그림이 그려졌어.
애들한테 전화를 했어. 우산 가지고 나오라고... 집으로 가는 길은 중목이 되어가는 느티나무가 두 줄로 머리를 맞대고 있거든. 느티나무 아래는 비가 떨어지지 않았다는 표시로 어두움 속에서도 뽀시시하니 나무 밑둥에 가로수를 켜 놓은 것 같았어. 비를 나뭇잎이 우산처럼 가려주기 때문일거야.
그래서 뛰었어. 나무와 나무사이는 뛰고, 나무 우산아래 멈춰서는 숨을 돌렸지. 비 냄새가 나. 흙냄새도 나지. 나뭇잎 냄새와 섞여서 고향냄새 같아.
우산 가지고 나오지 말라고 집으로 다시 전화를 걸었더니 어둠속에서 뛰어오는 아들이 보여. 언제나 싫어요 하지 않는 이 아이는 젖은 내 팔을 자기 손으로 닦아주었어.
뒤늦은 저녁을 먹었어. 삼주일째구나... 내가 새로운 일을 시작한지가 말이야. 너는 내가 일을 시작할때부터 걱정어린 문자를 자주 보내주었어. 첫출근하는 날 잘 다녀오라고 그러더니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는 수고했다고 문자를 주었어. 그러면서 계속 고생했지? 일배우기 힘들지? 하면서 전화를 자주 했고... 너의 먼저 베푸는 조건없는 사랑을, 인간인 내가 잊지 말아야지 하고 있어. 인간은 잘해줬던 많은 일은 깡그리 잊어버리고 몇번 섭섭하게 했다고 그 사람과 등을 돌릴 때가 더러 있거든.
네가 잘 알고 있지만, 내가 하는일은 서점에서 책을 파는 일이야. 지금은 신입이라서 밤시간에만 일을 하고 있어. 이걸 가지고 천만다행이라고 하는 걸거야. 창작동화책이 어디 있고, 과학책이 어떤 것이 더 좋은지 모르는데 고객이 많은 시간에 일을 하게되면 나도 힘들고 고객도 힘들고 운영하는 주인도 힘들테니까 고객이 뜸한 시간에 일하는게 정말 딱이야 빨리 일을 익힐 수 있는 방법은 없어. 무족건 책을 많이 보는 것뿐. 여기선 손님을 고객이라 해야 한데. 인사도...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안녕히 가십시오 고객님, 해야한데. 안그러면 고객으로 가장한 모니터한테 두 번 들키면 단번에 짤린다고 하더라고... 인사정도야 식은죽 먹기지. 유기농 장사하면서 인사는 엄청 잘했거든,손님이랑 싸웠어도 인사는 했으니까. 처음엔 창작동화가 어디 꽂혀 있고, 어디 출판사 책이 뭐가 있는지 몰라서 고객이 오면 "제가요...아르바이트한지 이틀밖에 안됐거든요." 이주일 되었을 때도 이렇게 거짓말을 쳐댔어.크크크...사회생활하는 방법이지 뭐. "책에 대해 잘 아시는분한테 전화해서 물어볼까요? " 엄청 죄송하다는 듯이 조심스럽게 양해를 구했어. 근데 이주일쯤 되니까 유치원용 책이 어디에 꽂혀 있고 고학년책이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었고, 출판사 이름을 대면 대충 뭔지 알게 되었어. 처음엔 과연 내가 삼개월이란 실습기간동안 수백가지의 책들을 다 꿰고 있어서 고객이 한마디만 하면 책꽂이로 착착 가서 원하던 것을 척척 찾아 낼 수 있을지 고민되더라고..
큰 딸아이도 나와 비슷한 일을 하고 있어. 롯데 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오늘은 힘들다고 괜히 짜증을 내는거야. 발에 물집이 생겼다느니.. 맞은편에서 일하는 또래가 맘에 안드다느니... 보통 힘든일이 아니라느니... 듣다가 버럭 소리를 질렀어. 언제 엄마가 알바하라고 했냐고??? 힘들면 그만두라고??? 입이 팅팅 불었는지 툭튀어 나와가지고 대답도 안하더니 화장실로 들어가 한참만에 나와서는 잔다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어.
‘기집애야..너는 잠시 아르바이트지만 엄마는 몇 년을 이런 일들을 해야 해.’ 이말을 덧붙이려다가 말았어. 그래..내가 먼저 아르바이트 해라 하기전에 딸아인 항상 일자리를 마련해 용돈을 벌었었어. 돈 얘기만 꺼내면 내가 인상부터 먼저 쓴다고 딸아인 그게 불만이었고, 나는 형편에 벗어난 지출을 줄이라고 잔소리를 했었거든...
그럼, 나도 너처럼 빗소리를 듣고 있어. 듣지 않으려 한다고 쳐도 비는 오랜만에 한을 풀듯 마구 풀어내고 있네. 낮에 창문 열어 둔 걸 깜빡하고 안 닫았더니 비가 베란다에 고여있어서 냉장고에 받혀 두었던 걸레를 갖다가 훔쳤어. 냉장고가 밑이 새네...분명 뚫어지지 않았는데 물이 자꾸 고여. 베란다에 빗물 고이듯 고여서 냉장고는 항상 걸레로 자기 밑구멍을 틀어막고 있어. 이것도 내 생각인데 대칭이 안맞아 그런 것 같어. 기계치인 내가 혼자 살다보니 이런일이 생기면 어른 남자가 필요하긴 하구나 그러고 말지.
아들아이는 어른 남자 되어가고 있어. 저번에 할머니네 씽크대 문이 흔들리고 삐딱해져 있었는데 얘가 공구통을 들고 와서 망치를 들었다가 놓고, 뻰지를 들었다가 다시 놓고, 드라이버를 들고 한참을 설치더니 씽크대 문을 똑바로 고쳐 놓은거야. 친정엄마는 마구 웃으시면서 고것도 남자네...하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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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소리보다 내 다리를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선풍기 소리가 더 커. 이 선풍기는 엄마가 주신거야. 내가 몇 년전에 쓰던 선풍기는 헬리콥터가 되어 어디로 날아가 버렸는지 아무리 뒤적거려도 없는거야. 그래서 올 여름의 거센 입김을 견디다 못 해 엄마는 아들 잘둬서 에어컨 있어 좋겠다 했더니 선풍기 있다고 가지러 오라는거야. 근데,공짜로 얻은 이 놈의 선풍기가 얼마나 목청이 크고 쇳소리가 나는지... 흔하게 보던 가분수 선풍기 말고, 길죽한 돌기둥같이 생긴...몇년전에 신문 바꿔보면 공짜로 주던 선풍기 같은거야. 이건 큰 동생이 회사에서 받아왔다는 선풍기라는데 공짜로 주는 건 다 이렇게 목소리만 크고 떠들기만 좋아하는가 봐. 그래도 그런대로 자기 역할을 다 하고 있는 것을 버리고 얼굴 커다란 것을 살 수도 없고....
아고...........씨끄러웟!!! 공짜 선풍기 꺼버렸어. 빗소리가 그쳤네... 그래서 선풍기 소리만 더 요란스러웠구나... 비가 가늘게 내리나? 창문을 가만히 보니 물방울들이 창문에 매달려 나를 들여다 보고 있었나봐. 나와 눈이 마주치니 눈웃음을 치네.... 그래...나도 너와 같이 빗소리를 듣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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