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인 어제는 비가 오락가락해서 산에도 못 가고 하루 종일 집에서 식구들과 뒹굴었다. 텔레비전 보는 것도 한두 시간이면 질리고 애들과 놀아주는 것도 금방 싫증난다. 제일 만만하고 쉬운 일은 역시 낮잠이다. 잠을 많이 자야 쑥쑥 큰다는 말로 아이들을 꼬드겨서 억지로 재우고 나도 몸을 쭉 뻗었다. 애들한테는 잠자는 엄마 모습이 익숙하다. 오죽하면 저희들끼리 놀다가 하는 대화가 엄마 또 자? 아니, 지금은 그냥 누워 있어, 이런 식이다.
아무튼 어제도 그렇게 낮잠을 자고 있는데, 남편이 전화 받으라고 흔들어 깨웠다. 비몽사몽인 상태로 전화를 받으니 친한 고향친구다. 친구는 당장이라도 수화기에서 튀어나올 것처럼 흥분한 상태였다. 안 그래도 남편이 결혼기념일을 그냥 넘어가서 섭섭하다는 문자를 지난밤에 받았던 터라, 얘기가 길어질 것을 예감하며 자세를 바로 잡았다.
지난 토요일이 결혼기념일이라, 친구는 그 며칠 전부터 남편한테 그 사실을 주입시키고 있었단다. 그런데 막상 당일 아침은 친구도 그 사실을 깜박했단다. 주말이라 손위시누네로 저녁을 먹으러 갔는데, 가는 차 안에서야 그걸 깨달았단다. 그래서 남편한테 얘기했더니, 잘 됐네. 누나네 가서 밥 먹으면 되지, 뭐. 그러더란다.
그대로 물러설 수 없었던 친구, 시누한테 가서 오늘 우리 결혼한 날이에요 했단다. 그랬더니 맘씨 좋은 시누, 애들은 걱정 말고 얼른 지금이라도 데이트하러 나가라고 등을 떠밀었단다. 한데 무뚝뚝한 친구 남편, 뭐 그리 대단한 날이라고 호들갑이야? 하는 바람에 친구도 시누도 다 머쓱해져 버렸단다.
그렇게 시누 집에서 하룻밤 지내고 왔는데, 어찌나 서러운지 설거지 하면서도 눈물이 흐르고, 화장실 가서도 줄줄, 자려고 누웠더니 아예 작정하고 눈물이 쏟아져서 남편 몰래 우느라 힘들었단다. 나중에는 친정이 부실해서 남편이 이리 무시하나 하는 생각까지 들더란다.
친구의 하소연을 들으면서 난 이 친구가 왜 갑자기 결혼기념일 타령을 하는지가 더 궁금했다. 친구도 나도 그런 데는 관심이 없는 편이다. 더구나 친구 남편은 현재 사업상 꽤 힘든 상황이다. 그런 남편한테 뭔가를 요구할 때가 아닌 것이다. 친구 역시 당연히 그렇게 생각한다고, 그래서 지금껏 그냥 넘어갔다고, 그런데 웬일인지 이번만은 너무 섭섭하다는 것이었다.
‘새삼 왜 그러지?’
‘글쎄, 10주년이라 그런가?’ 친구는 그제야 그 중요한 사실을 아무렇지 않은 듯 털어놓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시들하던 내 반응이 완전히 바뀌었다.
‘어머 정말, 벌써 10주년이니? 그럼 당연히 챙겨야지. 왜 그걸 이제야 말해? 정말 축하한다.’
10주년, 20주년, 30주년. 결혼 10년마다 무슨 이름이 붙고, 그때그때 선물하는 보석도 정해져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긴 결혼생활 중간 중간에 잘 한다고 칭찬도 해주고, 느슨해진 마음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서 그런 날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이제 6년 살아본 나로선 10년 20년 살아낸 사람들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결혼하고 3년을 넘기기가 힘들다는 요즘 세상에, 내 친구가 무사히 결혼 10년을 넘겼다는데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나? 처음 4년은 아이가 생기지 않아 마음고생이 심했고, 지금은 남편 일이 잘 풀리지 않아 가슴앓이 하고 있지만 정말 열심히 사는 친구다.
그런 친구의 소중한 10주년이 그냥 슬그머니 넘어갔다니 나도 서운하다. 꼭 남편이 결혼기념일을 챙겨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그래도 남편이 생색을 내주는 게 더 보기가 좋을 것 같다. 친구가 보석을 바라겠는가? 사치스런 선물이나 비싼 꽃을 바라겠는가? 그저 지난 10년간 잘 살아왔음을 서로가 자축하며, 맥주라도 한껏 분위기를 잡아서 마시고 싶었을 뿐이란다. 그걸 몰라주다니!
간단하면서 돈 안 드는 방법으로 얼마든지 여자를 감동시킬 수 있는데, 남자들은 그걸 잘 모른다. 친구와의 긴 전화통화가 못마땅하다는 듯 째려보고 있는 우리 남편 역시, 10주년이 돼봤자 별 기대할 게 없겠다는 생각이 일찌감치 든다. 어쨌거나 이미 역사적인 그 날짜는 지나갔지만, 친구 부부가 오늘밤이라도 오손 도손 좋은 시간 보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