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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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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좀 벗어날 때도 되지 않았니?


BY hayoon1021 2005-07-14

겨우 고등학교에 입학은 했지만, 공납금을 못 내 한 학기만 다니다가 휴학을 해야했다.

일 년 동안 봉제공장에 다니다가 다시 복학했다.

어느 날 계단에서 전 담임선생님을 만났다. 당시의 난 어찌나 위축돼 있었던지 반아이들과 얘기할 때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그런 내가 선생님 앞에서 감히 얼굴을 들 수 있었겠는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인사만 하고 지나치는데, 선생님이 날 불렀다.

그리곤 낮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젠 좀 벗어날 때도 되지 않았니?]

힘든 시기는 지났으니 이젠 좀 밝아져도 되지 않을까? 뭐 그런 안타까움이 담긴 말이었다.

그 말을 듣는 내 얼굴이 순식간에 확 붉어졌다.

나중에야 나는 그 상황에 잘 어울리는 말을 찾아냈는데, 가난이 부끄러운 건 아니지만 결코 자랑도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선생님은 10대의 발랄함이라곤 전혀 없이 궁상맞기만 한 내 모습이 어딘지 답답하고 보기에 딱했던 모양이었다.

일부러 궁상을 떤 건 아닌데... 나도 모르게 내 얼굴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늘... 근데 그걸 나더러 책임지라고?

내게 자존심이란 게 있었다면 아마 그때 상처받은 그 감정일 거다. 기분이 너무 상해서 본래 선생님 의도는 되짚어보기도 싫었다.

선생님은 시련이 지나갔다고 했지만, 그건 하나의 산을 넘은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어쨌든 그렇게 생활에 찌든 내 모습이 남한테 거북함을 줄 수도 있구나...그런 사실을 처음 알았다.

입술을 깨물었다. 오기가 생겼다. 보란 듯이 변해 주리라.

그 뒤 정말로 많은 변화가 왔다. 소극적이던 내가 억지로라도 적극성을 띠게 됐고, 자신감이 생기니 친구관계도 좋아졌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성과는 학업성적이었다. 그저 졸업장이나 따야지 하는 심정으로 복학한 내가 120명 중 10등 안에 들었다. 밤늦도록 학교에 남아 책과 씨름한 결과였다. 어떻게 해도 안 되는 수학은 아예 문제와 답을 외웠다.

3학년 때 다시 담임이 된 선생님이 1학기 성적표를 나눠주며 흐뭇해했다. 그걸로 선생님한테 섭섭했던 마음도 다 녹았다.

그로부터 딱 20년이 지났다. 지금 내 사는 모습을 본다면 선생님은 뭐라고 할까? 이제는 선생님이 뭐라고 하든 동요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 지금 내 모습이 여전히 청승맞아도 이게 나니까 말이다.

그때는 졸업만 하면 인생의 봄날이 기다릴 줄 알았는데, 삶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가난은 색깔만 다를 뿐, 한 가정을 꾸려가는 나를 여전히 위협하고 있다. 로또에라도 붙지 않는 한, 평범한 내게 인생역전이란 애초에 먼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날 선생님의 그 한 마디가 내게 자극을 주어 그나마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