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그 집은 엄마가 다니던 교회 집사님네 집이었다, 엄마가 가지고 있던 돈보다 비싼 방이었는데, 우리 집 사정을 아시고 보증금과 월세를 전에 살고 있던 방과 같은 가격으로 이사를 오라고 하셨단다.
이렇게 큰 방은 처음이었다. 내가 살던 방중에서 제일 넓은것이 내 속도 운동장이 되었다. 방은 하나였지만 길쭉하게 생겨서 가운에 철제 장을 놓고나니 방이 두 개가 되었다. 남자는 남자들끼리 쓰고 여자는 여자들 끼리 쓸 수가 있어서 졸지에 방 두 칸을 가져보는 행운을 얻은 거였다. 부엌도 살구색 차양이 덮힌 정사각형이어서, 살구꽃 아래 평상같았다. 무엇보다도 우리만 쓸 수 있는 부엌이라서 편리하고, 속옷 훌러덩 벗어 부뚜막에 올려 놓고 샤워 할 수 있는 공간도 생겼다. 연탄보일러라서 방도 따스스했다. 겨울에 따뜻한 물로 세수를 하고 비누향기 솔솔 풍기며 따스한 방에 앉아 있으면 어느 도시 어느 부자도 부럽지 않았고, 이보다 더 좋은 방은 욕심이라고 생각했었다.
난 성인이 되었다. 직장을 다니며 돈을 벌었다. 봄날 나뭇잎처럼 싱싱하고 상큼한 나이였다.
그런데 가난한 남자친구가 날 꽉 붙들고 있어서 싱그런 난 그 빛을 발하지 못했다. 내가 친구만 만나도 친구들 만나는 장소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서 친구들이 눈치를 많이 주곤 했었다.
친구들도 엄마도 이모들도 이 남자친구를 못 만나게 했다. 가난하고 성깔 있고 미래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남자친구를 만날 땐 반대의 말들이 듣기 싫었는데, 남자친구의 성깔을 체험하고선 서서히 남자친구를 내 마음에서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변사람들의 반대한 그 뜻을 헤아리게 되었다. 암튼 그 기억만 빼곤 난 그 집에서 살 때가 제일 풍요했던 시절이었다. 시장에서도 가깝고 버스 타기도 좋았던 다섯 번째 집 일층은 국수를 만드는 가게였다.
국수가 국숫줄에 널리던 날은 면생리대를 널어 놓은듯했다. 바람에 팔락팔락 흔들리는 국수
를 보면 빨아서 삶은 생리대를 빨랫줄에 널어놓은 것이 연상되었다. 깨끗하게 국수가 널린
일층을 지나고 철 대문을 열면 바로 시멘트로 만든 이층 우리 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오
는데, 이층엔 세 가구가 한몸처럼 몸을 대고 살았다.
우리방과 똑같이 생긴, 계단에서 가까운 방엔 아줌마 혼자서 아이 둘을 키우고 있었다. 그 아줌마는 내연이 처였다. 본처가 있는 남자와 아이 둘을 낳고 숨어서 사는 비밀스런 아줌마였다. 생활비는 남자가 물론 대주었고 가끔씩 다니러 왔는데, 그런날은 아줌마 얼굴이 영양크림 듬뿍 쳐 바른 것처럼 번들거렸다. 우리는 장롱을 가운데 두고 방 두칸을 임시로 만들어 사용했는데, 그 아줌마 방은 두칸으로 완전하게 수리를 하고 들어왔다. 남자가 오면 같이 자야해서 방 두 칸을 만들어야했다고 내연의 처 아줌마는 십수 년을 과부로 살고 있는 우리 엄마한테 빤빤하게 말을 했었다. 나는 그 아줌마랑 엄마가 대화를 섞는 것조차도 맘이 편치 않았다. 엄마도 그 아줌마처럼 어느 남자 내연의 처로 들어갈까 봐서 조금 염려가 되었다. 아줌마는 놀면서 남자 올 때만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엄마가 느끼기엔 태평한 세월로 보였을 것이다.
중학교 때 이모들이 엄마에게 재혼할 것을 부추겼나보다. 내가 그걸 알고서 엄마가 시집가서 애들 낳으면 밟아 죽인다고 했단다. 그리고 이모들도 그런 말 하려면 우리 집에 오지 말라고 목청이 터져라고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고 했는데, 난 왜 그 기억이 없는지...어린 나이도 아니고 왜 기억 속에 없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내 속에서 생각해서 나온 악담이 아니고, 즉흥적으로 나온 말이라서 그런가보다.
맞은편 방엔 임신한 새댁이 살고 있었다. 눈가에 기미가 까맣게 올라있던 배 불룩한 아줌마에겐 아기를 갖게 한 남편이 있었다. 그런데 이 남편이 나를 볼 때면 눈빛이 색달랐었다. 색으로 따지자면 왕십리 시장 길바닥 색이라고 해야 할까, 뒷골목 색싯집 아가씨들 눈빛이라고 해야 할까...뭘 먹고 그리 예쁘게 생겼어? 음흉한 눈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뭘 먹긴 뭘 먹어 네 마누라랑 똑같은 김치 먹고 살았지. 대꾸도 안했다. 어느 날 잠을 자다가 얕은 신음소리가 나기에 깨어났다. 맞은편 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서 귀를 열어 놓으니, 아기가 뱃속에 있는데 또 아기를 만드는 소리였다. 잘은 모르지만 분명 그랬다. 나를 볼 때 그 남편의 게슴츠레한 얼굴과 기미가 까맣던 새댁이 겹쳐져서 나는 깊은 잠을 자지 못했다.
내가 살던 왕십리 집들은 벽과 벽사이가 얄팍해서 소리만 높여도 다 들렸지만 부부생활을 하는 소리는 그때 처음 들었다. 방 한 칸에 시어머니랑 살아도 애를 배고, 인도는 길거리에서 애를 낳기도 한다니까 사람 사는 것이 이렇게 원초적이고 동물적인 걸, 그때 당시엔 더럽게만 보였고 징그럽게만 느꼈었다.
왕십리에서 살던 집들은 뜰이 없었다. 풀씨 한 톨 떨어질 수 없는 딱딱한 시멘트 마당이었고, 마당조차도 없이 최소한의 계단과 방과 방 사이의 틈도 내주지 않던 오로지 살아내기위한 먹고, 자고, 싸던 곳이었다. 한 칸 방에서 온 식구가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 서울살이가 이런건줄만 알았다. 고향은 가난해도 풀들이 뛰노는 땅이 널브러져 있었고, 산과 들과 냇가에서 실컷 뛰며 놀았던 공간이 있었기에 난 서울이 답답했고 짜증났고 정이 붙질않았다. 방학때면 책가방 보따리 하나 메고 외가가 있던, 고향 가는 시외버스에 올랐다. 성인이 되어서도 고향의 푸른 산길이 보고 싶어 시간만 나면 고향으로 떠났다. 이때 나의 유일한 취미는 편지 쓰기였다. 전화가 없던 우리 집이라서 그랬지만, 편지쓰기라는 제목으로 글이 샘터에 실리고, 그때가 덕수궁에 은행잎이 샛노랗게 떨어지던 늦가을이었다. 그래서 내 글을 보고 내 글이 좋아 편지를 보냈던, 첫사랑을 만났다. 첫사랑을 만나면서 서울 소식을 편지로 쓰다보니 서울을 내 삶터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시기가 이 곳 다섯 번째 집이었다. 국수가 생리대처럼 널려 있던, 어쩌다 내연의 처가 되어 한 남자를 기다리며 살던, 기미낀 새댁 아줌마의 야릇한 신음소리가 들리던...
새벽마다 몸을 앞뒤로 흔들며 눈물로 기도를 하시던 엄마와 서울교대를 다니던 큰 동생과 빡빡 머리 순둥이 막내동생과 처음으로 어설픈 두 칸의 방으로 행복했던 때가 내 나이 스물하고도 두 살이었다.
집 주인은 사는 형편이 힘들어져 오랫동안 살고 싶었던 두 칸의 방에서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첫사랑하고도 내 스스로 소식을 끊었다. 그러나 첫사랑은 그 집 주소로 계속 편지를 배달시켰다. 교회에서 엄마를 만난 주인집 아줌마가 내 이름으로 자꾸 편지가 온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