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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지 줍는 할아버지


BY 송영애 2005-07-04

노점상 아줌마의 일기 3
-폐지 줍는 할아버지-

송영애


"미안하요 아주마이. 술 한 잔 먹고 가도 되겄소?"
"네. 할아버지, 대신 조금만 드셔야해요?"
언제나 비슷한 시간대에 리어카를 끌고 힘겹게 언덕을 오르내리시며
폐지를 주워 파는 할아버지는 폐지를 팔고 오는 길이면
늘 주머니에 소주병을 담고 오시다가 포장마차에 들르신다.

언제나 변함없는 인사의 첫마디는
"미안하요, 아주마이."로 시작해서 끝날 때도 한결같은 인사다.
내가 술은 팔지 않기에 할아버지는 내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드시기가 미안한 것이다.
오늘도 여전히 리어카를 포장마차 앞에 세우시더니
"미안하요 아주마이, 오뎅 국물에 소주 한 잔 먹을라요."하신다.
할아버지의 주머니 사정도 알고 추운 날 폐지 주워 파느라 고생하셨는데
따뜻한 어묵국물 한 컵 그냥 못 드릴까마는
할아버진 항상 500원을 주시며
"아무 것이나 안주하게 좀 주쇼."하신다.
돈 안 주셔도 된다고 말씀드리면
할아버진 깜짝 놀라시며 무슨 소릴 하는 것이냐 하시며 날 혼내신다.
추운데서 고생하는데
어떻게 돈을 안 내고 그냥 먹을 수 있나 하시며 손사래를 치신다.

할아버진 떡볶이 500원어치와 어묵국물에 소주를 한 잔 드시면서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으신다.
나이가 83세나 되셔서 이도 빠지시고 발음도 시원찮아 알아듣기 힘들지만
어디 가서 답답한 속내를 털어놓을 데가 없으시다 하시며
날마다 내게 들르셔서 혼잣말을 하시다 가신다.
귀도 잘 들리지 않으셔서 목소리는 최대한 크게 하시고
지나가는 사람들 아무에게나 말을 건네기도 하신다.
남들이 들어주던 말던 신경 쓰지 않고 답답한 마음을, 넋두리를 늘어놓으신다.

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늘 같은 사연이고 슬픈 이야기이다.
"할아버지, 뭐가 그렇게 속상하세요?"
할아버지의 귀가 잘 들리지 않는 관계로 나 역시도 할아버지와 대화할 땐
큰 소리로 해야한다.
그럼 할아버지도 큰 목소리로
"아이고 속상하요. 참말로 속상하요! 우리 며느리가 말이요.
우리 며느리가 말이요...."
하시더니 눈물을 글썽이며 말을 잇지 못하신다.
"며느님이 왜요. 할아버지?"
소주 한 잔을 그냥 비우시더니
"아, 시아버지가 이렇게 산다고 날 무시하고
아침밥도 잠자느라 안 챙겨주요."하신다
점심때가 훨씬 지났는데 아직 아침도 못 드셨단다.
소주 한 잔과 어묵 하나가 점심식사라고 하셨다.
믿어지진 않지만 주위 사람들 이야길 들으니 맞는 얘기란다.

할아버지의 이야기인즉슨, 할머니께서 위암으로 돌아가시자
그 때부터 며느리가 할아버지를 무시하고, 뭐라고 싫은 소릴 한마디하면
친정으로 가서 사나흘씩 있다가 오는 일이 허다하단다.
아들도 며느리 편이라 누구에게도 말할 곳이 없다고 하시면서 내게 하소연을 하신다.
"할아버지 그래도 식사를 챙겨 드셔야지. 매일 술만 드시면 어떻게 해요?"하니
"아이고 지금이라도 걍 죽고싶소. 더런 놈의 세상 살아서 뭣하겄소."하신다.

"아주마이. 자식도 다 필요 없습디다.
부모가 못사니 자식도 아무 소용없습디다. 아니,
같이 살던 내 할멈이 없으니 자식도 돈도 아무 소용 없어라우..."
30분이 넘게 앉아 계시면서 소주 두 잔을 드시고 다시 소주병을 주머니에 담으신다.
많이 드시면 며느리가 싫어해서 그만 드신단다.
추운 날씨에 두꺼운 옷도 입지 않으시고 얇은 옷에 장갑도 없이 리어카를 끌고
들어가기 싫다는 집으로 향하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이
포장마차 앞, 낙엽 다 떨어지고 가지만 앙상한 나무처럼 너무나 쓸쓸하다.

우리에게 있어 부모란 어떤 존재인가.
늘 마당 끝에 놓인 오동나무 마냥 변함없이 묵묵히 자리하고 계셔서
그 사랑 받아먹고만 살아가는 우리들은
그 든든해 보이지만 서글픈 나무의 추움과 괴로움을 알지 못하리라.
어느 날 그 든든하고 뿌리 깊어 보이던 나무의 잎이
서서히 벌레들에게 갉아 먹히고 뿌리가 썩어 가는 걸 느끼고 후회할 때는
이미 우리에게서 부모님은 떠나시고 안 계신다.
내가 부모가 되어 보니 부모의 심정을 조금, 아주 조금은 알 것 같은데,
부모님 떠나신 후에야 그 자리가 소중했음을 깨달으니...
내 자식에겐 주고 또 주어도 모자라는 사랑을
왜 부모님에겐 그 절반도 드리지 못하는 걸까.

멀어지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고 서 있으려니
돌아가신 내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른다.
마음으로 무릎을 꿇으니 어느새 눈가엔 후회의 눈물이 젖어든다.
내일도 글피도 할아버진 변함없이 소주 한 병을 들고 오셔서
오늘 하신 이야기를 하고 또 하실 테지만
난 할아버지의 그 모습을 오래도록 뵙기를 소망한다.

(SBS라디오 '손숙 김범수의 아름다운 세상'에 방송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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