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여년전 사춘기 무렵으로 기억된다
당시 우리집은 크지 않은 밭외에 다섯마지기 논농사를 지었다 그 논에서 나오는 쌀이 6남매를 먹여살리는 큰 수입원 이였기에 닷마지기의 논은 우리집 재산목록 1호였다
그해 오월과 유월에 최악의 가뭄이 찾아왔다
지난 겨울부터 가뭄이 시작 되는가 싶더니 봄이오고 날이 풀려도 좀체로 하늘에서는 비를 뿌릴 기미가 보이지를 않았다 모내기 철이 되자 동네사람들은 합심을 하여 순서대로 논에 물을 대고 물이 어느정도 차면 물고를 다른집 논으로 보내는 방식으로 십시일반. 간신히 모내기를 할수가 있었다
겨우 논바닥을 적실만한 논에서 모를찧고 모를 심고는 이제나 저제나 단비가 내리기를 간절히 바랬지만 그해의 5월 하늘은 눈이 시릴만큼 청명한 나날이 계속되고 무정한 초여름에 따가운 햇살은 중부지방의 들판과 내 부모님의속을 까맣게 태워가고 있었다.동네 저수지는 바닥을 드러내고 온 중부지방의 물을 다 증발 시키려는 듯 태양은 지칠줄 모르고 춤을추고있었다 죽어가는 모를 바라보는 부모님의 탄식은 집안 분위기를 칙칙하게 만들기 충분했고 아버지는 새벽이면 논에나가 윗논에 물이차서 우리논에 까지 내려오기를 바랬지만 맨아래 우리논을 적실 물은 중간에 스며 들어 우리 논까지 도달하기에는 택도 없었다 부모님은 없는 살림에도 죽어가는 모를 살리려고 여기저기 돈을 융통해 고가의 양수기를 사서 하루종일 물을 퍼올렸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아버지는 "말세여 말세여."하늘이 미치지 않고서야 이럴수가 없다며 쨍쨍한 하늘을 원망 하셨다
혹여 밤새 비가 내릴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아버지는 풀벌레 소리에도 빗소리는 아닌가 안방 미닫이문을 여닫는 소리에 나역시도 잠은 설쳤었다.
그렇게 중부지방에 가뭄은 농사꾼들의 피를 말리며 온동네는 물과의 전쟁을 해야만했다
저수지 맨끝에 위치한 우리논은 다른집 논보다 훨씬 빨리 말라가고 있었는데 사람들 마음까지도 메말라 아무것도 아닌일에 시비가 잦아드는 사태가 종종 벌어지고는 했다 물은 사람들을 예민하게 만들었고 각박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며칠 양수기로 물을 퍼올렸지만 지하수도 말라버려 양수기로 끌어 올려지는 물줄기가 아이 오줌줄기처럼 가늘어져갔다 어렵게 심은 연두빛 어린모들은 생기를 찾다가 이내 새들새들 누렇게 죽어가며 논바닥은 손가락이 들어갈정도로 쩍쩍 갈라지고 따가운오월과 유월에 햇살은 신이난 듯 온 논바닥을 희롱하고 있었다
그렇게 쩍쩍 갈라지는 논바닥을 보며 애태우는 부모님의 눈빛은 뭐라 형언할수 없는 절망감과 함께 시름에 잠겨서 한숨조차도 쉬지를 못하는 상황이 되어갔다.나는 어느정도 철이들 무렵이니 부모님의 타들어가는 심정을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었다
어느날 저녁 무렵 아버지는 제방뚝에 서서 붉은 노을아래 삽을 들고 서계셨다 .
타들어가는 우리논과 제방뚝을 경계로 가뭄으로 바닥을 드러내다시피한 하천이 흐르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제방뚝에 올라서서 하천을 바라보며 뚝이라도 무너트려 하천에 물을 우리논으로 돌릴수는 없을까.아버지의 눈은 그렇게 애절 하게 말하고 있었다
제방뚝에 우두커니 서계신 아버지의 등뒤에서 어머니는 “그렇다고 비가 옵니까.점심도 자시지 않았는데 무슨힘으로 버틸라고 이래요..하늘도 무심치! 무심해! 어찌이리..”말을 잇지못하시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건조해서 갈라지고 있었다 .
그렇게 부모님의 애를 태우던 단비는 모가 자라지 못하고 거의 죽어갈때에 내려주었는데 그때 아버지는 급한마음에 한쪽 고무신만 신은채 한달음에 논으로 뛰어가셨다. 아버지의 다른 한쪽 고무신을 들고 아버지를 뒤따라가보니 아버지는 논바닥을 적시는 단비를 하염없이 맞으며 서계셨는데 아버지의 눈에서는 빗물을 가장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단비내리던 그날 내게 포착된 아버지의 눈빛은 배곯은 자식에게 젖을 물린 안도에 눈빛이였고 아버지의 그 눈빛은 사십이 넘은 이나이에도 잊혀지지가 않은채 가끔 추억 하고는 한다.
그해 최악의 가뭄으로 일찌기 나는 물은 “생명수”라고 .내머리속에 문신처럼 새겨져 물을 아끼는 습관이 지금까지 행해지는데.나의 습관으로 인해 대중목욕탕을 가면 종종 눈총을 받고는한다.그 생명수 같은 물이 철철 넘치는데도 아랑곳 않고 목욕 끝날때까지 하수구로 내려보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을 보는 나는 슬쩍 물을 잠궈주고는 내자리로 오면 "웬상관이냐 "듯 뒷통수의 따가움을 느끼지만 그해 최악의 가뭄으로 애태우던 부모님이 기억해져서 물을 소홀히 할수가 없었다.
일찌기 물의 귀함을 터득하였기에 지금도 세탁기를 돌려도 헹굼 마지막 단계에는 세탁기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세탁기 호수에서 나오는 물로 걸레를 빤다 수년전까지만 해도 반자동 세탁기를 사용할때는 마지막 물은 빼지를 않고 빨래만 건져 탈수기에 옮기는 식으로 물절약을 하였지만 전자동 세탁기를 사고보니 탈수만 따로 할수없어 거의 맑은 물인 마지막 물은 기다렸다가 걸레를 빨고는 한다. 왜냐면 물은 생명수와도 같기에...
그렇게 오랜 가뭄끝에 내려준 단비로 갈라졌던 논바닥은 물이 그득그득 차서 찰랑 거렸고 말라죽어가던 누런 어린모들은 며칠이 지나자 생기가 돌며 연초록색으로 싱싱하게 자라주어서 가을에 황금들판을 이루고 수확을 할수가 있었다.가뭄의 휴유증으로
비록 예년만큼의 수확은 미치지 못했지만
수매장에서 예년만큼 일등급은 받지를 못했지만 내 부모님은
죽어가는 모들을 발을 동동 굴리며 바라보던 초여름에 시름젖은 표정은 아니였다.
최악의 가뭄으로 기억되던 그해.모처럼의 시원한 단비를
쭉쭉 빨아들이는 메마른 논바닥 사이사이에서 나는 생명수를 보았다.
그해 가뭄끝에 내린 단비는 집안의 기둥인 오빠를 무사히 고등학교에 보낼수가 있었고
빛을 얻어 급하게 산 양수기는 두고두고 요긴하게 쓰여졌다
빨간 양수기의 힘겨운 모터소리. 지하수가 고갈되어 가늘어져가던 양수기의 물줄기 .부모님의 얼굴만큼 까맣게 타들어가는 논바닥의 아픈기억.
이제는 아스라한 기억으로 자리잡고 있지만 그해에 내리던 비는 그냥 비가 아닌 생명수였다 .그날 그생명수는 아버지의 땀이였고 아버지의 눈물이였다
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