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의 여자들은 20대의 여자들관 다른 이유로 바쁘다. 극성맞은 아이의 장난감과 남편이 어지럽힌 침대, 그리고 잊을만하면 한번씩 닥쳐오는 시집과 친정의 경조사가 그것이다. 30대의 여성은 친구를 일순위로 치기엔 나이도 너무 많고 할 일도 꽤 빡빡하다. 그녀들의 친구란 그래서 늘 뒤로 밀리기가 일쑤다.
모처럼 30대인 우리들이 만난 것은 지난 일요일이었다. 각자에겐 아기와 남편과 수시로 거취를 체크당하는 핸드폰들이 있어 멀리 나갈 수 있는 형편들이 아니었다. 모든 건 집에서 집으로, 해결을 보는 것이 관례가 된 지 오래였고 사각면이 휘어지게 들어차있던 상자곽안에서 아파트입구에 붙어있던 팜플릿 한 장을 또 떼내어 이번엔 또 뭘 시켜먹을까 머리를 맞대어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다 집어넣는 일도 꽤 짬짬해질 즈음이었다. 제법 그럴싸한 레스토랑이나 연일 상종가를 달린다는 영화 한편이 그 언제적이었는지, 얘기 도중 멎어있는 핸드폰을 만지작대다 각각 한번씩 집에 전화를 걸어 아기가 아직도 자고 있는지, 지난번처럼 또 고추장독을 엎은 아기도 모르고 남편이 게임삼매경에 미쳐 친정집에 민망할 일은 없는지 수시로 체크를 해야했다. 아주 나쁜 사람만 아니라면 하지, 뭐... 남자의 억센 입질에 영 걸려들지를 않다가 숫제 뻥 찼다고하며 미끼삼아 떠벌리는 나를 딸만 있어 외롭단 말만 되풀이중인 나이 든 남편을 갖고 있는 친구애 하나가 이렇게 말한다. 운명이니 사랑이니 그딴 게 얼마나 가겠냐며 도승같은 얼굴을 한다. 이 애의 눈엔 서른넘어 여적도 미혼인 나를 이전부터 옮아매며 가르치려드는 뭉근한 속성이 있었다. 약속시간엔 저혼자 늘 늦고 연애때도 입소문 한줄없이 일 다 저지르고 결혼도 일사천리로 발빠르게 진행시킨 전력에 친구들의 입방아엔 밥상머리의 쌀밥처럼 때만 되면 오르락내리락했던 애다. 니 애는 시간맞춰 밥주고 난 암때나 먹어도 된단거야? 라면에 밥을 말아먹고나니 역심이 더 들끓는다. 잘난 그 얼굴 볼 것도 없이 전화로만 말을 하고 끊어버렸다. 언제나 제멋대로인 시간들. 이유는 있어왔다. 아기가 아파 소아과에 가고 있다거나 시집식구가 다 모이는 제사이거나 그도 아님 친정에 일이 생긴 것이다. 또 아님 벌이가 시원찮은 남편을 따라 예정에 없던 중국이나 일본엘 가 소식이 아주 끊긴 경우다. 우린 만나고 싶을때 만나 영화를 보고 영화를 본 후 매운낙지집을 물어물어 찾아가던, 소싯적의 우리가 아닌 걸까? 엄마로 살면 후리덤(FREEDEM)은 정녕 빠이빠이인가? 세상의 모든 여자는 다 어머니가 된다던 어느 여류작가의 말엔 21세기 중반부를 치닫고있는 이 시점의 한복판에 횡뎅그렁 놓친 미스테익(MISTAKE)이 하나 있다. 바로 딩크족이란 신카드. 아베크족이라고도 한다. 늙어선 자신있어? 자신있다고 말해야한다. 헌데 우물쭈물이다. 실버타운이란 게 생겼지만 정말 돈많은 노인네가 아니면 들어가기 힘들다고 난리인 신문을 아침에 보고 나왔다. 노인문제는 사회문제고 그 사회문제는 또 골칫덩이가 되고 있다고도 했다. 절박한 뉴스는 볼 생각도 않고 엎어지면 코닿을 거리인 경로당앞엔 연일 할머니들이 똑같은 미장원에서 갓 볶은 듯한 머리들을 하고 등을 보이며 앉아 아침 8시면 나와 철사를 이고 꼬며 각자의 부업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녀들이 하고 있는 일은 겨울이면 코가 막히고 여름이면 쇠소리가 요란해 이웃들의 원성을 종종 사는 일이었다. 머리가 하얘지도록 돈을 모을 것! 싱글로 사는데 필수조건의 하나인 동전모으기! 혼자 살면서 1억만들기! 싱글, 결코 혼자가 아니다!... 난 책방엘 가면 그런 문귀들에 시선이 멈추는 날 발견하곤 한다. 그러면서도 뽀글머리가 하얗게 세서 철사를 꾀고 있을 나의 손을 참담하게 불쌍해 할 그 누군가가 없을 나도 떠올린다. 내게 자신(自信/自身)은 있는건가, 정말? 갑자기 허전한 생각이 들어 친구가 내민 아기사진으로 시선이 간다. 아기는 남편과 친구를 반쪽씩 닮아 그리 이쁘지도 그리 못나지도 않은 완벽한 동양 아기이다. 내가 동양 아기였을 적에 연년생을 길러 힘에 부치던 엄마는 시샘이 많은 나로 인해 둘째가 치였다며 사람들앞에서 가끔 내 욕을 하곤한다. 지금 힘에 부치게 만드는 동생의 아기도 나중에 크면 꼭 나와 같이 난 그때 그런 사실이 없었노라고 부인할 지도 모른다. 엄마의 기억에 있는 나의 유년은 고스란히 엄마의 것인 것처럼 나의 기억에 있는 조카도 고스란히 내 것인 셈이다. 난 아주 가난하지만은 않단 사실에 적잖이 안심이 되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아기가 주는 포만감. 아기가 주는 완벽함. 아기가 불려준 나만의 재산에 순간 흡족해졌다. 그때 친구가 울음보를 터뜨린다. 힘들어, 힘들어 죽을 것만 같아. 단순한 육아스트레스라고만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던가 보았다. 나를 가르치려던 이 친구는, 늘 늦게 와서 마침내 나를 화나게 만들었던 오늘의 이 친구는, 친구들과도 멀리 떨어지고 친정집서도 멀리 떨어지고, 저혼자 낳고 저혼자 기르고하다 남편이 곤한 잠이 든 야심한 시각에 또 저혼자 화장실서 문을 닫아걸고 소리죽여가며 몇날며칠을 울었노라고 했다. 외롭다고 둘째를 꼭 낳아야겠느냐고 반문하면 입만 굳게 다무는 남편의 그 입에 쇠수저라도 한대 갈기고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있어야만 시집식구들앞에 내 체모가 서겠더단 일전의 욕심이 발동만 더 걸린다면서 한동안 눈물만 쏟았다. 아파트문을 닫아거는데 새로운 팜플릿이 그새 붙어있다. 머리며 옷이며 되는대로 살아가는 나와 달리 아줌마가 된 친구들은 되려 화장과 머리에 정성을 기울인 흔적이 역력하다. 모처럼 서로를 본 우린 이제 치레란 걸 차려야하는 새록새록한 남남인 것인가? 현금인출기앞에 줄을 선 꼬마에게 아줌마소리를 듣는 나는 정녕 아줌마같고 엘리베이터에 같이 올라탄 2살배기 아들을 둔 친구는 아가씨소리를 듣는 괴짜 아파트에서 난 바삐 빠져나온다. 매운 봄바람을 얼굴로 쏘여가며 버스정류장에 그렇게 길게 섰는 우린 손과 목이 30대임이 분명하지만 가슴만은 순수한 20대를 향해 역공의 날개를 펴는, 하늘하늘한 봄처녀의 허리를 닮아가고 있다. 장롱면허를 집안 깊숙한 어딘가로 숨긴 우린, 하나 둘, 그렇게 번호판이 다른 버스에 올라타고 아기와 남편이 숨막히게 기다리는 각자의 블랙홀속으로 서서히 빨려들어간다. 정류장천막안으로 비가 들치기 시작한다. 조카는 수월한 아기가 아니었다. 동생의 유두가 검게 변할수록 아기의 보채임도 심해져갔다. 자지러지게 울다가도 할머니의 손이 닿으면 울음을 그쳤고 유모차안에서 잠들기를 거부하는 횟수가 늘어갔다. 몰래 밖을 나가려는 얌체아내를 잡아끄는 남편과 아기를 안고 고스톱을 치는 불량남편이 못마땅한 아내. 동생과 제부는 서로의 외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울음소리가 들리면 가위바위보를 하며 서로에게 미루는 밤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아기가 없었다면, 함께 밥을 먹으면서도 시선은 밥에 고정이 돼있다거나 아님 TV에 한정이 돼있다거나 하는 등의 일이 벌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랑은 식지않았는데 열정은 한순간 식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말이다. 언젠가부터 아기가 아니면 할말이 딱히 생각나지않는 사람들이 된 것만 같은 기분. 부부에게 아기는 축복인 동시에 희생인 것이 맞다. 희생을 먹고 자란 아기야말로 삶은 풍요로울 것이고 마음은 부자일 것이다. 나역시 그런 희생의 끝자락에 오늘이 있어왔다. 조카에겐 효자가 되라고 주문을 걸면서도 오늘의 나역시 효녀로 살아가고 있을까? ...역시 우물쭈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