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 저 좋아하세요?
송영애
공순이라 불리던 우리들의 미싱사 생활은 다람쥐가 쉼 없이 돌리는 쳇바퀴처럼,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이고 내일도 또 오늘 같은 날이었다.
눈을 뜨면 기숙사에서 밥을 먹고 하루 10시간씩 드륵드륵 박아대야 하는
그 지겨운 생활을 10년 훨씬 넘게 한 후로 난 미싱 소리만 들어도,
미싱을 보기만 해도 그냥 머리가 아파 온다.
그런 지겨운 일상 속에서 가장 부러웠던 건 남자친구가 있는 내 친구들이었다.
봄이면 한강으로 닭살(?)스럽게 손잡고 나가는 게 부러웠고
몸이라도 아플라치면 약을 사다 주는 남자 친구의 모습은
생긴 것과는 상관없이 얼마나 멋있었던가.
나와 친한 친구 경아도 남자친구가 있었다.
친구는 미싱사고 남자친구는 다른 공장 재단사였는데
어찌어찌해서 만났는데 생김새만 봐서는
너무나 못생긴 남자친구가 별로 라고 생각됐지만
내 친구 경아에게 하는 그의 자상하고 세심한 행동들을 보니
너무나 멋진 남자라는 생각이 들면서 친구가 많이 부러웠다.
그러던 어느 주말에 경아가 남자친구를 만나는데 함께 가자고 했다.
별로 내키진 않았지만 특별히 할 일도 없는 주말 저녁이라 친구를 따라나섰다.
친구는 호프집에서 남자친구를 만나기로 했다며 그곳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곳엔 경아의 남자친구와 어떤 시골 아저씨 같이 생긴,
성격 털털해 보이는 한 남자가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나는 그를 아저씨라고 불렀다.
우린 서로 인사를 나누며 맥주를 마시고 그냥 미적미적하게 있다가 헤어졌다.
그리고 3년 정도의 세월이 흘렀을까.
나와 경아는 경아의 남자친구 회사로 직장을 옮겼고
그곳에서 경아의 남자친구와 3년 전에 맥주를 같이 마셨던
그 시골 아저씨 같은 아저씨를 또 만났다.
언젠가 한 번 스쳐갔던 사람을 다시 만나는 일은 은근히 신나고 재미있는 일이었다.
집이 서울이었던 우린 인천으로 출퇴근을 했는데
시골 아저씨 같은 그 사람의 차를 타고 나와 경아,
그리고 경아의 남자친구는 출퇴근을 했다. 자연스레 우리 넷은 가까워졌고
저녁이면 가끔 만나 인생을 논하며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었다.
그렇게 1년여를 함께 했는데 자꾸만 경아의 남자친구가
"병석이형 어떠냐? 사람 참 좋지?"라며 내 대답을 들으려 애를 쓰는 것이었다.
난 그동안 정이 많이 들었던 터라 "응, 참 좋은 아저씨 같아"라며 이야길 하곤 했는데
경아와 경아의 남자친구가 내게, 아저씨가 날 좋아하는데 내게 말을 못한다는 것이었다.
나도 그 아저씨를 지켜 본 후 참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그 이야길 들으니 기분이 참 좋았다.
아저씨는 내가 그 이야길 못 들은 줄 알고 늘 나를 보면 수줍어하는 모습이라니.
그리고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고….
언제쯤 고백을 하려나 기다려도 도대체 내게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난 '이 사람이 날 좋아하긴 하는 거야?'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내게 하는 행동들을 보면 좋아함을 느낄 수가 있는데 명 짧은 사람 숨넘어가기 딱 좋았다.
어느 날, 아저씨와 난 둘이서만 술을 마실 기회가 있었다.
아저씨는 술이 거나하게 취해도 도대체 날 좋아한다는 그 한마디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나도 술이 취했겠다 성질 급한 난 그만
"아저씨, 저 좋아하세요?"라고 말해버렸고
아저씨는 그렇지 않아도 술을 마셔 빨개진 얼굴이 더욱 빨개지며
차마 앞에서는 보기 민망할 정도로 수줍어했다.
'내가 미쳐…'라고 속으로만 생각하며
이미 뱉어버린 내 말을 수습하기가 힘이 들어서
앞에 놓인 소주잔을 들어 단숨에 마시노라니 이 아저씨 입에서 나오는 한마디.
"네..."
네? 겨우?
아저씨의 성격을 알기에 멋진 프러포즈까진 생각을 하진 않았지만
내가 먼저 프러포즈를 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억울했다.
그런데 이 아저씨 그 날 이후로 변해도 너무 변하더라.
수줍어하던 그 남자는 어디 가고 어딜 가나 내 손을 잡고 다니고
3살 차이 나는 나이에 아저씨라고 부르는 내게 오빠라고 불러 달라고도 하고
새벽 2시가 넘어도 우리 집 앞 교회에서 나를 안고 놓아주지도 않고,
헤어지고 나서 길 건너 자기 집을 가면서 전화를 붙들고서
"나 지금 횡단보도 건너고 있어."
"지금 집 앞에 다 왔어."
"이젠 씻고 자려고 해."
"또 보고 싶다."
내가 먼저 좋아하냐고 묻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던가?
10년이 지난 지금 그 남자는 가끔 투정을 부리는 내게
"네가 먼저 살자고 옆구리 쿡쿡 찔렀지, 내가 먼저 살자고 옆구리 쿡쿡 찔렀냐?"라며
큰 소리를 친다.
그럼 난 "그래, 여자에게 프러포즈 받은 남자 자랑이다"라며 웃어 넘긴다.
지금 곁에 옆구리 찌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망설이지 마세요. 그냥 쿡쿡 찌르세요.
MBC라디오'여성시대'방송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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