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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님이 하신 김치를 친정에 나눠주는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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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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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부의 진실.


BY 합격이엄마. 2005-05-26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던 날이 떠오른다. 그 아침, 아침잠에서 채 깨지못한 채 엄마의 울음소리만 들었던 기억, 지금도 생생하다. 엄마는 할아버지의 둘째 며느리다.
엄마는 요새 힘이 든다고 한다. 엄마가 내가 아니고 내가 엄마가 아니니 서로의 감정을 온전히 이해한단 말은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엄마는, 엄마로서 살아온 지난 세월속에 한과 눈물만 남아보이고 그런 엄마의 삶은 여자의 삶이 보잘 것 없다고 느끼는 피해의식을 양산해내는 것 같아 안타깝다. 엄마로 살고 있지만 여자로도 살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난 생각된다.
이제 엄마로 살아갈 동생이 있다. 샤워를 하면서 전혀 부끄럽지않게 자신의 몸을 드러내고 샤워를 하고 있는 내 동생. 부른 배가 가슴위까지 차올라 이젠 허리고 가슴이고 앞뒤가 빵빵한 축구공만 같다. 아들을 가졌다고, 새 아파트를 가졌다고 여기저기 자랑하고 다니는 제부는 시집시구들을 한명이라도 더 초대하겠다고 성화를 부리는 중이다. 그는 이제 내 마누라, 내 자식, 내 집을 다 가진, 30대라면 이상적으로 생각되는 안정적인 삶의 궤도에 진입해있다. 하긴 엄마와 아빠에게도 30대라면 가졌었을 내 마누라(남편), 내 자식, 내 집이 있었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그때는 자식을 낳고 기르고 재산을 불리느라 한창 바쁘기도 했을 것이다. 지금처럼 등을 돌리고 누워 서로의 입냄새를 역겨워하지도 않고, 그 찬 등을 본 다음날 아침에 혼자 국에 밥을 말아먹으며 남편흉을 보지도 않았을 것이며 친한 지인에게 와이프가 이전만 못해보인단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혼은 정말 미친 짓인 걸까?
엄마는 처음부터 사랑받는 며느리는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가산을 다 잃었고 큰아버지는 총각몸으로 월남에 가야 했기에 고스란히 그 몫은 엄마의 차지였다. 20대초반의 젊은 엄마는 두 아이를 이고 지고 페인트공들의 참을 날르기도 했고, 군입대를 한 남편을 대신해 이따금 오는 시집식구들을 집안에 들여 한방에 누워 새우잠을 자기도 했다고 한다. 이제 자청이든 타청이든 그때 그런 일을 했던 모든 것들이 뭉뚱그려진 한이 되어 아빠가 심한 말을 한다고 여겨지거나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하거나 밤늦게 술을 먹고 등을 보이는 날이 되면 어마어마한 휘발성을 갖는 화학물질이 되는 것 같다. 문지방하나를 넘으면서도 12가지 생각을 하는, 엄마이자 평생 여자이고픈 엄마를 아빠는 뚱뚱한 뽀글머리의 늙은 여자라고 여기는 것은 아닌지 나는 잘 들여다본다. 과연 나의 50대는 영원할 수 있을지 의구심을 가지면서.
사랑은 짧고 정은 길다고 했던가. 엄마와 아빠는 사랑따윈 해본 사람들같지가 않다고 여겨졌다. 사랑해서 놓아준다는 말은 그렇다면 거짓말이 아닐 지도 모르겠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는 연애만 하는, 그래서 볼 것 못 볼 것 안 보고 쿨하게 헤어지는 것만이 정석인,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있다고 감정도 그만 못해지고 누그러지고 하는 건 아닐테니까.
할아버지가 큰며느리와 살고 너무 젊어 암것도 모르는 큰며느리가 할아버지완 안 맞는다는 판단이 드시자(엄마말로는) 그제서야 할아버지가 엄마를 찾으셨다고 했다. 나이 어린 동서를 맏이로 맞고 홀대와 냉대에 울기까지 했으면서 엄마는 그래도 할아버지의 식성을 30년넘게 기억해서 설날 온 가족이 모여앉은 밥상머리에서는 할아버지는 늘 엄마가 권하는 음식으로만 젓가락이 가시곤 했다.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건 단감, 찐 가지, 조기와 굴비. 그리고 안 좋아하는 건 계란, 콩나물국 등이라고 했다. 실제로 그런 할아버지와 엄마를 보면서 시간이 갈라놓지 못하는 것도 있단 걸 알 수 있었다. 과거가 현재보다 아름다울 수 있단 생각도.
아빠보다 엄마와 함께 하는 시간이 길었던 대한민국의 대개의 딸일 수 밖에 없었던 난, 그래서 엄마는 피해자, 아빠는 가해자, 그렇게 단정지었었다. 여자의 마음을 다독여주는 일을 먼저 못하고 늘 엄마를 화가 나게 만드는 아빠가 미워서 심한 말을 뱉고도 귀잠을 자는 딸일 적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부부로 아직 살 일이 없는 내가 부부로 30년넘게 사는 엄마와 아빠의 관계를 다 안다고 말할 자격이 있을까 이제 또 고민한다.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진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라고. 부부는 부부만이 아는 비밀이 있는 것이라고. 아빠역시, 대한민국의 대개의 아빠일 수 밖에 없었던 듯 명퇴를 심각하게 고민했으면서도 또 그렇게 혼자 앓다 이냥저냥 할아버지에게나 다녀오잔 말을 하는, 바깥일은 남자혼자 해결해야한다고 쓸데없는 믿음을 갖는, 그런 아빠였던 것이다. 여자다움을 강요받고 살아온 엄마와 남자다움을 강요받고 살아온 아빠. 그 속의 한가운데 방년의 내가 있다.
세상에서 절하는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와이프를 가졌으면서도 그 베일을 제대로 걷히지 못하고 살아가는 한 남자의 딸로, 세상에서 가장 독한 발냄새를 가졌다고 입으론 욕을 하면서도 실제론 그 발냄새를 누구보다 사랑함을 깨닫지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한 여자의 딸로 또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