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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살 버릇 여든 간다.


BY 낸시 2005-05-05

어려서 공부가 하기 싫었다.

중학교에 가지 않게 해달라고 아버지에게 두 손 모아 싹싹 비볐다.

"아버지 난 이 세샹에서 제일 하기 싫은 것이 공부니까, 제발 나를 중학교 좀 보내지 말아 주세요..."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벙어리, 봉사, 귀먹어리와 같은 것이니, 아버지는 그래도 날더러 중학교는 가라고 하였다.

시골학교라서 과외 대신 담임선생님이 중학교에 갈 아이들 방과 후에 남겨 놓고 수련장을 풀게 하였다.

사 십 년 전 이야기다.

토요일이면 학교 마당에 아이들이 같은 마을끼리  깃발을 앞세우고 줄을 섰다.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시절, 아이들은 그렇게 줄지어 하교도 하고 마을 청소도 같이 하던 때다.

중학교에 가게 되어 수련장을 풀어야 하는 나는 그런 아이들을 교실에서 바라보며  가슴앓이를 하고 있었다.

집에 가면 뒷마당에 먹시감도 홍시가 되었을 것이고, 앞멀 밭 가장자리 밤도 벌었을 것이고, 텃밭 가에 대추도 빨긋빨긋해졌을 텐데...

마음은 들로 산으로 밭으로 헤매고 다녔다.

줄지어 선 아이들을 보내고 교실로 돌아 온 담임선생님 앞으로 갔다.

"선생님, 저 머리 아픈데 일찍 집에 가면 안될까요?"

"어디 한번 보자..."

담임 선생님은 내 머리도 만져보고, 맥박도 짚어 본다.

"열이 좀 있는 것 같고, 그런데 맥박은 왜 안 뛰지...?"

선생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히히...'

난 속으로 신이 났다.

그 시절 난 몸이 약했는지, 실제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항상 이마가 따뜻했고 맥은 미약해서 잘 느낄 수가 없었다.

하긴 지금도 혈압이니, 혈당이니 하는 것들이 수치가 다른 사람에 비하면 현저히 낮으니 천성적으로 그런 사람인 모양이다.

아무튼 담임을 속이고 일찍 집에 온 나는 산으로 들로 헤매고 다니며 감도 따 먹고, 밤도 까먹고, 대추나무 밑을 얼쩡거리기도 하였다.

 

"엄마, 하루종일 전화도 안되고, 어디 갔다 오셨습니까..."

"가긴 어딜 가, 레스토랑 사이트에 가서 꽃밭에 풀 뽑고, 물 주고 그랬지..."

"그런데 전화는 왜 안들고 다니는지요..."

아들은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날 놀리는 것 같기도 한 말투다.

"임마, 내 옷에 주머니가 없어서 일할 때는 그냥 가방에 넣어두고 하지..."

"오늘, 메뉴 사진 마저 찍기로 한 것은 까맣게 잊으셨습니까...?"

"아니지, 잊긴... 너한테 전화했더니 바쁘다고 끊었잖아... 그리고  오늘 스시 레스토랑 하는 사람들 모임에 간다고 하였었고... 그래서 오늘 못하는 줄 알았지..."

"엄마아... 그것은 저녁인데... 사진은 낮에 찍는 것이고..."
"그랬니?... 미안하다. 난 그것이 점심인 줄 알았지..."

이런 때는 오리발이 최고다.

나는 아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사실은 봄바람이 나서 땡땡이 한 것인데...

 

어제 남편이 서울에서 돌아왔다.

메뉴 사진 찍기로 한 일정을 알 리 없는 남편이 꽃밭에 가 보자고 하니  마음이 들떠 집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썸머코스모스가 몇 송이나 더 피었을까도 궁굼하고, 활짝 핀 노란 켈리포니아 파피의 아름다운 모습도 눈에 아른거렸다.

스시 레스토랑 하는 이들 모임에 간다고 하던 아들 전화 생각이 나서 어쩌면 오늘 사진 찍는 것은 못할 지도 모른다고 혼자서 지레 짐작을 했다.

아니, 그러길 바랐다.

아들에게 전화하니 바쁘다고 나중에 이야기 하자고 한다.

얼씨구...하고 준비하고 레스토랑 자리에 가서 한번 둘러보고 공원에 가자고 남편을 꼬드겼다.

지난 번 눈 여겨 둔 꽃씨도 받고, 선인장 꽃이 지금쯤 한창일 것 같아서...

텍사스 공원은 들꽃과 선인장이 볼거리다.

들꽃들은 여전히 형형색색 아름답고... 선인장 꽃도 기대만큼은 아니지만 예쁘고...와일드버비나, 불루아이드그래스 꽃씨도 넉넉히 받고...

신이나서 돌아와 받은 아들의 전화에 난 이실직고 할 수가 없다.

에고... 세 살 버릇 여든 간다고...

그 때나 지금이나 들이 산이 부르는 유혹에 왜 이리 약하기만 한지...

오늘은 어제 찍지 못한 사진을 꼭 찍어야 한다는데... 어제 본 선인장 꽃이 아른거린다.

'오후라서 꽃이 별로였던 것 같아... 선인장 꽃은 오전 햇빛에 보아야 최고인데...얼른 가서 보고 와서 준비할까?... 그러면 시간에 쫓겨 제대로 준비가 안되겠지... 참아야지...참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