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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노래..동숙의 노래


BY 셋째딸 2005-05-04

 아버지의 노래(동숙의 노래)
해마다 맞이하는 어버이날이 오면 가슴부터 저려온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동정이 아릿한 슬픔이 되어
마음 저 밑바닥에 가라앉는다
경주최씨 사성공파 26대 장손으로 태어나서 학문도 익히고
남부럽지 않게 살아오신 아버지.......
그러나 어느때 부터인가 ...아니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시대를  비관하며 모든 것이 딸이 많다는 핑계로 아버진 타락되어 가셨다..
따라서 가족의 의식주도 다 팽개치고 술에 의지해서 살으셨다
그리고 엄마에 대해서 극도의 의처증이 발동하여
그 괴롭힘의 정도는 이루 말할수 없었다
나 어렸을 적부터 기억하자면 우리집은 사흘이 멀다않고
냄비뚜껑 솥뚜껑이 담장을 넘나들었다
딸이 하나 둘씩 늘어남에 따라 비례해서 아버지의 주사는
더 심해갔고 아예 무위도식으로 변해 갔다
우린 아버지가 흉기를 들고 설쳐댈 때 마다
너무나 무서워서 밤마다 집을 뛰쳐나와서
남의집 처마밑이나 헛간에서 별을 보며 눈물 흘리기를
부지기수였다
이것은  그래도 좀 나은 편이 었고 눈이나 비가 올 때면
갈곳이  없어서 동네 상여 집이나 성황당이 유일한
우리들의 피신처였다
아버지가 떳다 하면 우리들은 귀신도 무섭지 않았다
이것으로 끝나는게 아니라,,,더욱 심한 것은
우리들의 옷가지나 세간이며 더불어 귀중한 책가방까지
불에 태워버리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희망과 꿈이 붉게 타서 한줌의 재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절망감에 소리 없이 울고 또 울었다
그래서 도저히 집에서 살수 없다고 가출을 하려고 해도
뒷전에 서있는 엄마의 서글픈 눈동자 때문에 차마
비뚤어 질수가 없었다
왜냐면 우리 엄만 일본에서 나서 자란 교포였고
열 여덟 살에  유학 온 아버지를 만나
단지 한국사람이라는 미더움으로 결혼을 했고
내가 세 살 때 고국인 한국 땅에 오직 아버지만 믿고  들어오셨다
하지만 반겨 주는 이 하나 없는 곳에서 말도 전혀 모르고
문화귄도 다른 타국 아닌 고국에서 벙어리로 살아야 했다
물론 지금은 우리들에게 말과 글을 배워서 잘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엄마의 눈에는 항상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있었고
어떠한 경우에라도 아버지 앞에서는 무릎을 꿇은 자세에서
아버지의 주사를 운명처럼 받아들이셨다
그런 폭풍 같은 고통속에서도 동생들은 태어났다
물론 딸 딸 딸.....모두가 여덟 명...
아버진 일곱째 여덟째는 아예 동사무소에 가면 창피하다고
출생신고도 하지 않았다..나중에 나와 동생이 가서 했다
하긴 막내 여덟 번째도 딸을 낳자 손수 산에다 탯줄을 묻으며
통곡하시던 아버지의 뒷모습을 숨어서 보았을 때
너무나 불쌍하고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아마도 아버지의 마지막
기대가 무너진 순간이었던 게다
그리고 방에 가득 누워있는 딸들을 바라보며 얼마나 한숨을 쉬셨을까....
그 후 아버진 더 이상의 기대를 묻어버리고 우리들에게 항상 말씀 하시길...."어느 구름에 비가 들었는지 모른다...거짓말 하지 말고 정직하게 살아라...너희 중에 누구라도 잘 될 인물이 있을 것이다 ..형제 지간에
우애 있게 살아야 한다..."
그러나 돌아서면  아버지의 주사는 더욱 흉폭 해졌다
그러나 아무리 강하고 무서운 아버지이지만
세월 앞에는 장사가 없다고 하지 않던가...결국 아버진
술 때문에 병이 들어갔다
거의 매일 소주를 됫병으로 마시며 술에만 의지하시더니
폐결핵과 간장이 나빠져서 손을 쓸 수없이 악화되어 버렸다
그 건장한 체구와 폭풍 같은 위엄은 다 어디 가고
그저 피골 상접한 모습으로 운명의 시간만 기다릴 뿐이었다
그렇게도 무섭고 미웠던 아버지가 죽음이란
생각지도 못했는데...
아버진 서서히 꺼져 가는 촛불 같은 생명에 혼신의 힘을 실어
운명하기 전날 밤 갑자기 노래를 부르시는 것이다
바로"동숙의 노래"를 2절까지 또렷한 목소리로 부르시는 것이다
피를 토해내는 듯한 절규의 몸부림이 섣달 추운 밤하늘의
찬 공기를 가르며 흩어졌다
평소 아버진 이 노래를 가장 싫어하셨는데.. 그래서 단 한번도
이 노래를 부르신 적이 없었다
"...때는 늦으리....때는 늦으리...."를 몇 번인가 되 뇌이셨다
우리들은 아버지가 부르는  동숙의 노래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었던 노래이다...그리고 다음날 아침 아버진 두 눈도 못 감은 체
쓸쓸히 돌아가셨다
겨우 이 만큼 밖에 못사실 것을 왜 그렇게 괴로워하며
고독하게 사셨는지 ...너무나 불쌍하게 돌아가신 아버지...
가시나무 새 같이 그 사랑을 딱 한번의 노래를
부르고 돌아가신 아버지 ....
우리 딸들 아버지의 인생이 서러워 가슴이 너무 아파서
지금도 동숙의 노래만 나오면 가슴이 먹먹해 온다
그리고 살아생전 양지바른 푸른 숲이 우거진 곳에 묻어달라시던
말씀대로 못해드리고  화장을 시켰다..
그것은 딸들마저 다 가고 이 세상에 없으면 무덤을 누가 돌 볼 사람이
없다고  아버지의 유해를 굳이 절에다 모시게되었다
물론 어머니도 당신 가시면 아버지와 같이 있게 해 달라신다
그렇게 아버지가 가신지 벌써 20년이 지나갔다
이제 생각하면
진정 우리 여덟 딸은
아버지의 마음속의 어느 한구석도 차지할 수 없는 뜬구름이었다
그중 한 명도 아버지의 위로가 될 수 없었던 우리는
암울했던 지난 시절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의 향수가 가슴 쓰리도록 안타깝다
지금 세 아이들 다 키웠고  내 나이  내년이면 지천 명이다
오늘따라 왜 이토록 눈물이 나고
아버지가 보고싶고  따뜻한 손을 한번 잡고 싶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