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출근하는 남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내 맘은 항상 편치 않았다. 구부정한 남편의 등뒤로는 을씨년스러운 늦가을 바람소리 같기도 하고 문틈을 비집고 들어올려는 칼바람 같기도 한 쇳소리가 쉬임 없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쉰을 훌쩍 넘어버린 나이지만 어깨에 짊어진 무게 때문에 매일 아침 어김없이 현관문을 나섰다가 어스름이 거뭇거뭇 깔리는 시간이면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와야 하는 일상을 반복해야 했다.
오늘만큼은 힘들지도 말고 스트레스도 받지 않고 들어오라는 주문을 속으로 매일같이 하고 있었다. 겉으로 뱉아 낼 수 없는 나 혼자만의 넋두리에 가슴은 항상 병든 이파리처럼 누렇게 오그라 들었고 퇴근해서 들어오는 남편의 표정을 민감하게 훑어봐야 하는 일이 또한 나의 일상이 되어 버렸다. 그 날의 심기는 - 빳빳하거나 느슨해진 - 압축된 표정이 말해 주고 있었다.
남편의 표정이 나에게 전이되는 시간은 극히 짧았다. 속된말로 알아서 기어야 했다.
각이 선 표정일 때는 가급적 말을 아껴야 했지만, 부드럽고 느슨하게 풀려 있을 땐 쓰잘데기 없는 수다도 거부감 없이 다 수용해 주는 아량을 보이는 남편이었다.
아직은 젊은 나이라고 애써 겉포장 둘러치지만 조금씩 구부러지는 어깨의 각도로 인해서 입고 있는 윗도리의 뒷단이 뻘쭘하게 들려 있었고, 점점 면적을 넓혀 나가는 이마의 빈자리가 속임수의 진상을 대변해 주고 있다. 그뿐만 아니다.
용 단지의 그 우렁우렁 울림 같던 목소리도 잦아들기 시작했고, 보이지 않게 조금씩 면적이 좁아지고 있던 사고의 울타리도 어느 샌가 바늘 꽂을 틈새 하나 없이 비좁기만 했다.
5년 전에 받은 대수술로 인해서 술친구와 담배를 잃어버려야 했다. 남자로서 사는 의미의 일부를 상실하고 보니 세상살이에 재미가 없어진 거다. 그래서 남편은 점점 더 작아지고 좁아지고 왜소해져 갔다.
나이 탓이려니....
나이 들면 남자는 여성 호로몬이 분출되어서 여성화되어서 그러려니......
여자의 기가 살아나는 반면에 남자의 기는 점점 죽어가서 그러려니........
그러려니..그러려니........
'다들 그러려니' 하는 맘이 없었다면 남편을 바라보는 내 눈시울은 어느 하루도 마를 날이 없었을 거다. 부부가 살면서 이 '惻隱之心'이 없다면 애틋한 맘도 살가운 맘도 가질 수 없이 서걱거리는 사막 같은 관계가 아닐까 싶다.
이 惻隱之心은 맹자의 '四端'중 '仁'에서 우러나오는 측은한 맘에서 생긴다고 했다.
그랬다.
남편을 생각하면 측은하고 불쌍하다. 남자로 태어난 운명적인 삶을 혼자 감당하면서 버겁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허리 휘는 생활을 반세기 넘게 꾸려 왔다.
결국엔 혼자일수 밖에 없는 독립된 개체지만 주위에 둘러쳐진 가족이라는 군상의 중심에 서 있기에 어느 하루도 편한 웃음 제대로 여유롭게 웃을 수 없었다.
어려서는 어른들 틈에서 숨소리 한번 크게 토해내지 못했고 성장해서는 거느릴 가족에 의해서 남편의 몸은 점점 납작하게 바닥에 달라붙어야 했다.
어깨를 누르던 자식 중 하나가 떨어져 나가서 한결 가벼워졌다지만 땅 짚고 일어설 기력은 이미 쇠진해 있었다. 바닥에 너무 오랜 시간 엎드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간신히 일으켜 세워 놓았지만 시대적인 바람이 너무 거세었다. 고령의 직장인에게 돌아오는 푸대접과 해고의 압력, 무능과 고액의 연봉을 핑게 삼아 명퇴라는 사탕으로 유인했다.
베짱으로 버티기엔 무리수가 따랐지만 백기 들기엔 왠지 억울하고 떼 밀리기엔 이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편의 어깨에 매달린 힘겨운 삶이 놓아주지 않은 탓에 희미해진 시력과 가물거리는 기억력을 가지고 책상머리에 붙어 앉아야 했다. 젊은 직원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늦은 시간에도 컴 앞에서 더듬더듬 검색창을 열고 젊은 그네들과 섞여야 했다. 그네들과 어울려서 어깨높이 맞출려고 까치발로 서 있어야 했다.
남편에게는 홀로 설 수 있는 가족이 아직은 없다. 아직은 남편의 힘에 의해서 살아야 하는 가족들이 남편의 혈관속을 너덜너덜 하도록 헤집어야 했다. 남편은 비명조차 지를 수 없는 목구멍 막힌 기형아다.
울대를 치고 올라오는 설움조차도 아래로 쓸어 내리면서 시치미를 떼어야 했다.
아이들이 아직은 경제력 있는 아빠를 존경하고 의지한다. 손 벌리면 지갑 열어서 빳빳한 지폐 빼주며 아빠의 자리 가장의 자리 한치의 삐걱거림 없이 하고 있다.
남편이 존재하는 이유가 목적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했을까를 생각했다.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목적이 남편의 발목을 거머쥐고 있었나 부다. 우리 가족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남편을 생계수단으로 삼아야 했다는 염치없고 가슴아픈 사실만은 인정하고 싶다.
가장의 이름으로 가족부양이라는 건전한 피겟을 들이대기엔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지만 그것의 뚜렷한 정체를 알 수가 없다.
그게 무얼까........
남편은 다가올 미래를 겁내고 있다. 아니 어쩌면 내가 더 겁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무너져 버릴 것 같은 남편의 지지대가 나에게 쏠릴 걸 난 두려워하고 있다.
남편의 그 굴레를 내가 이어 받아서 지탱해야 하는, 눈에 보이는 미래를 피하고 싶어진다. 달아날 구멍은 다 막혀 버리고 나를 위한 탈출구나 쉼터는 이미 다른 사람의 차지가 되어 버릴 것 같았다.
저녁을 먹고 둘이 가까운 뚝방 길을 걸었다. 아파트 뒷길로 트여진 이 뚝방길은 주변 주민들이 즐겨 찾는 쉼터이며 산책로인데 저녁 시간이면 어깨가 서로 부딪힐 정도로 복잡하다. 도도히 흐르는 강줄기를 따라서 뚝을 만들어 놓았고, 뚝길위에는 벚나무를 심어 놓아서 멀지않아 눈꽃같이 흐드러지게 필 벚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기다려 진다.
남편은 이 시간을 참으로 좋아한다.
건강을 위해서 가벼운 운동 차원에서 나왔지만 둘이서 도란도란 얘기 나누며 잠시라도 아내에게 기댈 시간을 가지고 싶어하는 남편의 속내를 난 알고 있다.
묵직한 남편의 입이 쉴새없이 열리고 있었다. 이런 날은 남편의 심기가 편치 않다는 거 20여 년을 곁에서 지켜본 내 더듬이가 감지하고 있었다.
이런 날 일수록 절망적이거나 부정적인 대화는 가급적 피해야 한다.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얘기를 듣고 싶어서 남편은 힘든 얘기 쏟아 놓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뻔한 결론이지만 우회적으로 남편의 심기를 편안하게 해 주는 기술도 살다보니 터득하게 되었다. 주로 비관적인 남의 얘기에 촛점을 맞추다가 낙관적인 나의 얘기로 결론을 내렸다.
남편은 수긍하였고 자신의 좁은 소견을 아무렇지도 않게 인정해 버렸다.
'그럴 수가 있냐구...'로 혈압 높히다가 '그럴 수도 있구나....'하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꾸기까지는 나의 입도 쉴새없이 움직여야 했다.
어린아이 달래듯이, 고삐 풀린 망아지 잡아채듯이 난 어느샌가 남편을 조련하는 조련사가 되어 있었다.
남편은 나에게 비교적 협조적이지만 엉뚱한 궤변으로 감당이 안 될 만큼 어깃장 놓을 땐 오히려 내가 조련을 당하는 느낌을 받곤 했다.
사소한 일로 시비가 붙을 때 참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람소리 나는 남편의 휘어진 뒷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밖에서는 찬바람이 속곳을 헤집더라도 안에서는 알몸으로도 여유를 부릴 수 있도록 배려 해 주는 게 나의 몫으로 남아 있다.
힘들어하는 그의 눈 안에 웃고있는 내 모습을 담아 주어야 하는 것도 내 의무였다.
내 살을 깎아서 남편에게 보탤 수만 있다면 난 그리 할 것 같다.
더 이상 찬바람 부는 그의 뒷모습 만큼은 보지 말았으면 하는 욕심 내어 보고 싶다.
남편의 반쯤 올려진 윗츄리닝 지퍼를 목까지 올려주었다. 까칠한 턱수염이 손등에 닿았다.
명치끝이 울컥거리는 소리를 냈지만 태연하게 웃어 주었다.
"당신 턱수염에 비료 주었수? 아침에 면도하는 것 같두만요..."
남편은 '요소'를 뿌렸다고 가볍게 맞장구를 치며 응수했다.
돌아오는 뚝방길을 잔잔하게 웃으며 한결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