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온 풀꽃들은 잘도 커 주었다.
토끼풀은 한겨울에도 초록잎을 떨구지 않고 살아냈는데...
토끼풀 속에 알 수 없는 줄기가 길다랗게 올라오더니 어느 날은 머리위에
화관을 쓰고 있었다. 그 여자는 신기해하면서 꽃 속을 들여다봤지만
꽃잎은 보이지 않고 꽃 몽오리만 잔뜩 달려 있었다.
그 여자는 집으로 와서 봄 길가게 피는 꽃이란 책을 뒤적였더니
그리 귀하지 않는 눈끝에 흔히 발견되는 점나도 나물이란다.
토끼풀과 씀바귀를 퍼 담아 왔더니 그 속에 점나도나물 씨가 들어 있었나보다.
그 여자는 수퍼마켓을 한다. 성격이 제각각인 손님이 하루에도 수십명씩 드나들었다.
이번 겨울동안 장사를 하면서 그런대로 익숙한 장사치의 노련함이 보였는데
그 여자는 아줌마같은 할머니손님한테 만은 화가 나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넓은 평수에 사는 이 분은 할머니면서도 피부나이는 삼십대 같았고
몸매나 옷 스타일은 사십대로 보이던 아줌마같은 할머니셨다.
아줌마같은 할머니 손님은 계란 한판을 사가지고 가다가 집 앞에서 손에 힘이 없어
엎어져 다 깨트렸다고 겨울동안 매장에 올 때 마다 그 여자 탓을 했다.
배달을 안 해 줘서 그랬다고...
그 여자는 그럴 때마다 풀꽃화분이 살고 있는 곳으로 와서 지랄...부자면 다야.
씨발...겉은 젊은데 손은 늙었나부지 하면서 30분씩 끓여도 수돗물 냄새가 가시지 않는
시린 보리차를 마시며 열을 식기곤 했었다.
계란 한판을 엎었다는 할머니는 고무인형 같았습니다.
피부는 팽팽한데 감정을 잃어버린 인형말입니다.
세월이 모질게 스쳐간 인형인데 피부는 창백하고 주름하나 없는
버려진 고무인형 말입니다.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와 라디오 소리가 뒤섞인 가게에
그 할머니의 가당찮은 목소리는 가게 분위기를 올라붙게 만들었습니다.
우리 셋도 흥분이 되어 목소리가 커지고 쇳소리가 났지만 할머니의 목소리는
버스가 지나가는 도로위에서 아스팔트를 뜯어내는 기계소음 같았습니다.
고무인형닮은 할머니가 간 다음 주인 아줌마는 우리 있는 쪽으로 와서 욕을 해댔습니다.
짧으면서도 그 속에 장사치의 속터짐을 품어서는 욕을 가래침 밷듯 밷아냈습니다.
안 갈 것 같은 겨울이 가고 있었습니다. 선풍기같이 생긴 난로를 이리 들고 왔다가
손님이 오시면 손님쪽으로 데리고 가던 겨울은 가고 있었습니다.
내 머리위에 꽃은 핀 듯 만 듯 피었다가 졌습니다.
친구들도 나의 핀 모습을 자세히 보지 못했고 주인 아줌마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가게 안이 춥고 항상 그늘져 있어서 나는 꽃을 실속 있게 매달지 못하고
그냥 시들어 지고 말았습니다. 이래서 난 겨울이 싫어졌습니다.
그 여자는 내복이 세벌이나 있다.
두 벌은 그 여자의 친정 엄마가 선물을 받은 것이었는데
추운곳에서 장사하는 딸아이가 안쓰러워 준 것이고
한 벌은 왕창 세일한다는 잠깐 상설 매장에서 헐값으로 산것이다.
친정엄마가 준 건 촌티 나는 분홍색이고,그 여자가 산 건 내복색으로는 드문 연한
하늘색이다. 그 여자는 겨울장사를 하면서 세벌의 내복을 번갈아 입고 다녔다.
말라비틀어진 그 여자는 내복 가지고도 추위를 견딜 수 없어
난로를 항상 끼고 장사를 했다. 그러나 어느날 목욕을 하다가 무릎부분에
벌겋게 알 수 없는 얼룩이 진걸 발견하게 되었다.
벌건 무릎의 원인은 난로의 열기 때문이었다.
난로의 열이 차츰차츰 그 여자의 피부를 태워 먹었던 것이다.
몇 년을 난로를 끼고 살면 난로로 인해 피부가 검붉게 변한다는 것을 단골 손님을
통해 들었다. 그 손님은 지하에서 구멍가게만한 판촉물 사업를 하는데
난로를 껴안고 살다보니 열이 많이 오는 다리부분에 얼룩 무늬가
그 여자처럼 생겼다한다.
그 여자는 무릎과 무릎사이에 원하지 않았던 통증도 없는,
무고통 난로 문신이 겨울동안 새겨져 있었다.
그 여자에겐 너덜거리고 얼룩진 사랑 하나가 있었다.
스물한살 때 만난 첫사랑.
사랑을 알기엔 어렸고 사랑을 이기기엔 나약했던 청춘이었다.
시인이 꿈이라던 그 사람은 십삼년만에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 되어서
그 여자에게 나타나던 날은 봄바람에 흔들리던 중년이었다.
그 사람은 그 여자를 사랑할 때 그랬다. 나의 전부, 나의 전부라했다.
그 여자는 그 사람과 헤어질 때 그랬다. 지울 수 없던 사람이었다고...
죽을 때까지 지울 수 없는 사랑 후 다친 자국이라고...
3월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가게안은 찬물을 들이키기엔 이가 시린 날씨입니다.
점나도인 나는 겨울동안 꽃을 이고 살아서 주인 아줌마에게 눈길을 많이 받아
그런대로 추억을 잘 만든 겨울이었습니다.
가끔씩 마음이 고운 손님이 오시는 날은 나도 덩달아 기분이 날아가곤 했습니다.
손님중에 얼굴도 마음도 시냇물 같은 분이 있었습니다.
그 손님은 식품을 사가지고 간 것 중에 맛이 없으면 맛이 없으니 다음부터는
그 식품을 들이지 마세요 하고 전화를 하시는 분이시고 맛있었으면
정말 맛있으니까 다른 손님 오시면 자신 있게 팔라고 전화를 걸어주시는 분이랍니다.
주인 아줌마는 그 분이 오시면 그 분을 닮아 목소리와 얼굴색이 시냇물이 된답니다.
어떻게아냐구요? 물론 여기선 안보이지만 그걸 꼭 두 눈으로 확인해야 아나요?
좋아하는 마음을 말로 표현 못해도 눈빛이나 목소리만 들어도 알듯 뻔한 거 아니겠어요?
그 여자는 풀꽃 화분을 날씨가 네가지 색으로 변하는 오늘... 밖에 내 놓았다.
오늘은 날씨가 희한했다. 아침엔 안개비가 내리더니 한낮엔 햇살로 내리더니
저녁엔 밤이 된 것처럼 어둡다가 그 여자가 퇴근할 무렵엔 비가 다시 내렸다.
그 여자는 살이 휘어진 우산을 받쳐들고 퇴근을 했다.
나는 창밖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주인아줌마가 창밖으로 내다 주었습니다.
창안에서 햇볕과 바람 부족으로 영양실조가 걸려 꽃도 제대로 피우지 못했는데
창밖으로 나와서 이제는 꽃을 내 힘껏 피울 수 있겠습니다.
창안 기류는 음습하고 고기 썩은내가 났습니다. 음식 쓰레기 냄새와
하수구 냄새도 났었다는 걸 주인 아줌마는 알면서도 안 그런척했습니다.
손님 앞에선 깨끗한척도 하고 고상한척도 하고 돈이 없어도 없는 척을 안했습니다.
장사가 안돼서 하루 벌이도 시원찮은 날도 장사가 괜찮아요 하면서
가식적인 웃음소리도 여러번 들었습니다.
아무튼 이런 소리를 안 듣게 되어 밸이 안 뒤틀려 좋습니다.
창밖은 차소리가 요란하고 빈박스 주으러 오는 사람들의 후줄근한 얼굴을 보게 되어
기분이 가라앉지만 그래도 밖은 사람 사는 소리가 나서 좋습니다.
아이들 하교길 모습도 귀염성 있고, 뭘 훔쳐 먹었는지 배불룩한 고양이도 볼 수 있고,
때국에 절은 방랑개도 만날 수 있답니다.
무엇보다 제일 신나고 좋은 건 비와 바람과 태양이지요. 거르지 않는 자연입니다.
주인 아줌마는 휘어진 체크무늬 우산을 펴 들고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걸어갔습니다.
그 쪽이 우리를 데리고 온 집으로 가는 길인가봅니다.
우리가 살던 공원 화장실은 겨울동안 새로 공사를 해서 오줌냄새 똥냄새가
한결 수그러졌다는 소리를 봄바람을 통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