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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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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잘난 남자


BY 오월 2005-03-20

남편은 가끔 저에게 불평을합니다.

남들은 나보고 잘생겼다는데,당신은 왜 한번도 그런말 안하느냐고....

누가그래요? 하며 저는 그냥 웃습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남편은 회사에 근무할때 수백명 사원중에 삼대

인물로 꼽혔다네요.

결혼이란 남들이하는거고 저한태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고 생각하고

엄마를 도와 어린동생들을 공부 시킬때 저는 중매로 남편을 만났습니다.

 

처음 남편을 만났을때 작은키 그리고 예의없는 모습에 저는 화가 많이

났었고 저와는 반대로 엄마는 그사람을 남자답다며 많이 예뻐 하셨습니다.

가까워 지고 싶어하던그와 싫었든저는 많이 싸우며 그사람 다른모습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거짓없고 박력있고 과묵하고 저는 그 힘든 생활을 엄마에게 모두 맡기고

탈출에 성공을했지요.

 

남편의 잘난 수난의 시작은 신혼여행에서 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신호대기중에 평소 알고지낸듯한 다방아가씨가 차문을열고 남편목을

끌어안고 뽀뽀를 하더군요.

함께탄 남편친구들 당황해하며 아가씨를 끌고 어디론지 사라졌습니다.

고운한복입은 새색씨 다소곳이 앉아있었습니다.

 

우리의 신혼생활은 산골 오지에서 시작됐습니다.

제가 낮선곳에서 흘린 눈물은 정말 너무나 많습니다.

퇴근해 들어온 남편은 하루도 빠짐없이 밤마실을 나갔습니다.

어느날은 꼴딱 날을새우고 어느날은 새벽녘 어느때는 남편얼굴을

이틀씩 못볼때면 동료집에 찾아가 우리남편 출근했던가요?

하고 묻는 일도 있었답니다.

 

어느날 친정엄마가 절찾아와 입덧으로 먹지못해 말라빠진 저를보고

들어오지 않는 남편을보고 무서워 떨며 지새우는 저를보고 집에

도착할때 까지도 우셨다는 말씀을 훗날에 들었습니다.

그렇게 전국을 떠돌며 이사를 했고 남편의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동료들이 가정을이루고 주위에 함께 살다보면 귀막고 살려해도 자존심

상하는 말들은 들려오기 마련입니다.

저는 밤이면 아이를 업고 동료들 집앞을 서성이곤 했습니다.

그 집에서는 음식 냄새가 나고 아이들웃음소리 남편과 아내의 도란거림이

그렇게 담장을넘어 제 가슴을 시리게 했습니다.

 

그래도 우리 남편은 왜 안오는지 자존심이 상해 물어볼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알지요.

어느 다방에 어느 술집에 누구와 빠져있는지.....

남자들은 그런걸 우정이라며 숨겨주고 감춰주지요.

하지만 여자들은 그걸 말합니다.

직접이 아니면 누군가의 입을통해서 귀에들어가도록....

 

둘째 아이를 가졌을땐 너무심한 입덧으로 일어나질 못했습니다.

꼭 한가지 음식을 먹었는데,그게 '회'였습니다.

하루종일 누워있던저는 회사에서 밥을먹고 퇴근한 남편에게 일어나야

한다며 회를 사다달라 했지요.

그렇게 나간 남편은 날이 훤이 밝아서 빈손으로 들어와 옷을갈아입고

출근해 버렸습니다.

너무너무 너무 서운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무지많은 하열을하고 아이가 유산되고 말았습니다.

 

다음에 아이를 가지기위해 수술을해야 한다기에 마취제를 맞고

있을때 남편이 수술동의서를 들고 들어와 생년월일을 물었습니다.

간호사가 아줌마 참 불행하게 사시네요.아직 생일선물도 한번

못받아봤겠네요.하데요.

저는 그냥웃으며 수술실로 향했던거 같습니다.

길을 가다가도 다방이보이면 다 들어가고 싶어합니다.

그렇다고 남편이 아가씨와 농담을 하는것도 아니고 커피한잔 마시고

나오는데 뭔가 서로 통하는게 있나봅니다.

선수끼리는....

 

하지만 웃기는건 남편은 아직 그런여자일로 직접 저에게 털미를 잡힌적도 남편

핸드폰으로 이상한 전화나 문자메시지가 날아와 저랑 싸워본적이 한번도

없습니다.과연 선수는 선수인듯합니다.

그야말로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없다는 얘기죠.

13번의 이사와 지긋지긋한 근성으로 똘똘뭉친 회사를 그만두고

떠돌이 생활을청산하고 이곳에 정착한지 15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처음 이곳에 정착해서도 남편의 밤새우기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사업을 빌미로 놀음에 빠져든남편은 거의 매일 밤을새우며 커피와

담배로 건강을 해치기 시작했습니다.

 

육류나 생선류를 못먹는 남편은 밤을 꼴딱 새우며 커피와 담배에만

의존을했었답니다.

제가 그때 아컴을 알았다면 많은 도움도 받았을태고 그토록 많은 밤을

눈물로 새우지도 않았을텐데요.

남들에게 극성맞은 여편네 소리를 들어도 아이 들쳐업고 남편찾아

헤매지 못한것을 남편을 저승문턱에 보내놓고야 가슴을쳤습니다.

하루밤 자고나면 내남편은 눈사람이되어 녹아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귀신에 들린것처럼 아픈곳도 없이 그렇게 얼굴이 검어지며 살이

빠지기 시작했는데.가만히 서있어도 바지가 훌렁벗어지고 변기에

엉덩이 살이없어 아파서 앉지도 못했습니다.

급기야 후들거리는 다리 때문에 서있지도 못하고 눕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아픈곳이없다며 병원가기를 거부했고 막 벌여놓은 사업상 남편은

쉴수도 없었답니다.

아직은 어린 아이들 날 힘들게 했던 남편에대한 미운감정들......

사람들이 무섭다며 남편을 피하기 시작했습니다.

요위에 반듯하게 누운남편은 숨만쉴뿐 이미 살아있는 형상이 아니였습니다.

앙상한 갈비뼈 경련으로 뛰는배 간간히 다녀가시며 병원을 드락거리든

모습을 지켜보시든 양가 부모님이 모두 올라오셨습니다.

사후 이야기도 조심스럽게 나왔습니다.

이글을 쓰자니 한없이 눈물이 쏟아지지만 저의 지난날의 기록이라고

생각하며 씁니다.

그날밤 남편의 고통을 지켜보다못해 여러 사람이 부축을해서 병원에

옮겼습니다.

 

너무심한 경련이 일자 어머님이 의사선생님께 경련을멈추는 주사한대를

강력히 요구했고 그 주사를 맞은남편은 갑자기 숨이 멎었습니다.

응급조치를 해서 다시 맥박은 돌아왔지만 남편은 의식을 잃었습니다.

앰블런스에 남편을싣고 인공호흡기를 달고 의사선생님과 큰병원을 향해

달리는 차속에서 실낟같은 희망을안고 저는 남편귀에 수천번 아이들이름을

불러주었습니다.

의사선생님이 의식을 잃지마라 붙잡고 꼬집어뜯은 젖꼭지는 퇴원을하고

3개월후에 몽우리가 풀렸습니다.

 

한번도 반응없는 남편과 병원에 도착하고 저는 정신을잃었습니다.

시어머님은 며느리마저 잃을까 저를 붙들고 통곡을 하셨다더군요.

그밤 새벽녘 모두들 돌아가더라고요.

의식없는 남편을두고 꼬박 날을새우고 아홉시쯤 남편이 눈을떴습니다.

그리고 병실에 옮겨져 치료를 받으며 밝혀진 남편의 병명은 갑상선 기능향진증

이라더군요.

남편이 병원에 있을때 시집식구들에 원망을 많이도 들었습니다.

안그래도 힘든상황에서 한심하다며 쳐다보는 그 눈빛들이 지금도 잊을수가

없답니다. 더 큰병원에 데려가지 않는다며 질책하는 시집식구들 저는 지금

벌여논 일때문에 어머님 돈이없어요.

했지만 어느 누구도 병원비 를 만들어주며 병원가라는 소리는 없었습니다.

 

어느날 친정 엄마의 부름을받고 친정에 들렸더니 엄마가 제손을잡고

옥상으로 올라갑니다.

급하게 내손에 쥐어준 돈뭉치는 축축하게 젖어있었습니다.

자식들이 많다보니 이런것도 떳떳하게 못주는구나 그동안 자식들이 용돈주는걸모아

방바닥밑에 숨겨 두었더니 습기가 차서 축축하구나.

이걸로 ㅇ서방 큰병원에 한번가봐라.

그 돈으로 엄마, 제가슴을 덮었습니다.

아직도 10여년 세월이 흘러도 제 가슴이 이리따뜻합니다.

그렇게 남편은 서울대학병원을 찾았고 지금은 일년에 검사,결과 두번씩 다니며

정상적인 생활과 행복한 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아직 약복용은 매일하고 있습니다.

 

48키로 남편은 지금 74키로 입니다.

그 과정을 겪으며 남편은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죽음의 문턱을 헤매다 돌아와보니 가엾은 아내만 자신앞에 있더랍니다.

남편건강도 못챙겼다며 당하는 아내가 무지 가엾더랍니다.

이제 내가 아내를 위하며 건강만 찾으면 아내를 위해 살거라고 다짐을

했답니다.

그리고 남편과 함께 퇴원을해서 집에오든날 저는 챙피한 줄도 모르고

엉엉 소리내어 울었습니다.

남편이 살아 발로걸어 우리들집에 돌아오다니 얼마나 눈물이 나던지....

 

잃은것도 많았지만 얻은것도 많았습니다.

정말 그 잘난 남자는 이제야 제 곁에 돌아왔습니다.

언제나 아내가 먼저고 아내의 의견이 존중됩니다.

저를 출세시키는 것이 가장큰 보람이라며 이제 제 인생을위해 살라며

공부를 시작하라합니다.

일년에 두번 병원을 찾을땐 꼭 동행을합니다.

차도 두고 늘 바쁜 우리둘인지라 여행이라며 들뜨기도 합니다.

구운계란도 사먹고 호두과자도 사먹고 후루룩 가락국수 한 그릇에도

행복합니다.

4월 제남편이 두번 병원가는 달입니다.

결과가 좋아 약도 끊을수 있다면 얼마나좋을까요.

 

이제 저는 남편보며 말합니다.

당신 정말 잘났어!

살아준 당신이 얼마나 고마운지 자다일어나 꾸벅꾸벅조는 모습도

얼마나 귀여운지 당신 모르지.

요즘도 가끔 모처럼 만나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살아있었어요?

하는 인사를 받는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