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매서운 강풍이 창문을 흔들던 날.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화초들을 실내로
옮겨두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아침 기온이 영하 11도까지 떨어진다 했는데.
걱정스런 마음에 한 걸음에 베란다로 달려나갔다.
키 큰 벤자민. 향기로운 로즈마리, 소복하게
꽃대가 올라오고 있는 시클라멘. 모두 무사했다.
그런데 빨간 꽃이 무더기로 피어난 제라늄 화분
하나가 변을 당하고 말았다. 단지 창가에 한 발짝
다가 있었다는 이유로.
핏빛처럼 붉은 꽃송이들은 손을 대자마자
눈송이처럼 하르르 떨어져 내렸고
냉랭한 가지엔 얼음이 사각거렸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죽음은 슬프다.
겨울날. 철 모르고 피었다가 별처럼 얼어붙은 개나리도
보도블록 틈새에 끼어 어렵사리 꽃을 피우다 무심한
발길에 짓눌려버린 민들레도.
책을 읽다가 우연히 죽어버린 모기를 발견했다.
책갈피에 앉았다가 책장을 넘기는 순간
동작이 정지된 채 박제가 되어버린 듯 했다.
모기로서는 그야말로 황당하고
억울하기 짝이 없는 죽음일 것이다.
투명하고 여린 날개, 작디작은 다리를 털어내니
모기는 먼지가 되어 허공으로 사라져버렸다.
죽음이란 그런 것이다.
다시는 볼 수도 없고 사랑은 물론 미움조차도
허락하지 않는 것.
실체는 사라지고 기억만 남았다가
산 자들의 가슴 속에서 지독한 고통이 되고
슬픔이 되는 것.
하지만 그 슬픔과 고통마저도 흐르는 세월 따라
서서히 퇴색되고 무디어지는 그런 것이다.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 친지에게서 십자매
한 쌍을 선물로 받았다.
하루에 한 번씩 모이와 물을 주고 가끔씩
새장을 청소 해 주었다. 새들은 알 수 없는
언어로 노래를 불렀고 어린 아이들은 그런 새들의
노랫소리에 즐거워했다.
그렇지만 난 처음부터 새를 키우는 일이 영 탐탁지 않았다.
아무리 인간에게 길들여 진 동물이라 하더라도
세상의 모든 새들은 드높은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며
자유롭게 살아야 하는 것을...
비좁고 답답한 철창에 갇혀 매일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일상을 반복하는 일은 보는 것만으로도 갑갑한
노릇이어서 난 문득문득 새장의 문을 활짝 열어 그들에게 무한한
자유를 주고 싶은 유혹에 빠지곤 했다.
십자매를 입양한지 일 년이 채 못 된 여름날이었다.
친정어머니의 입원으로 정신없이 돌아다니다
집에 와 보니 새들의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어디로 갔을까.
차라리 용감하게 탈출이라도 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새장 안을 들여다보던 난 그만
끔직스런 새들의 죽음 앞에 경악하고 말았다.
먹다 남은 모이통은 엎어져 있었고
곳곳에 뜯겨진 깃털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바닥을 드러낸 채 바짝 말라버린 물통이
그들이 죽어야했던 이유를 증명해 주었다.
새들은 갈증으로 몸부림치며
물을 찾아 탈출을 시도했을 터이고 그러다가 결국은
탈진해 죽어갔을 것이다.
활짝 펼쳐진 날개며 체념한 듯 감아버린 눈.
어지럽게 널려진 깃털들.
난 그들의 죽음 앞에 고개조차 들 수 없는 죄인이었다.
소중한 생명을 하나도 아닌 둘씩이나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죄책감에 난 며칠을 밥맛조차 잃고 말았다.
그리고 목마름으로 몸부림치던 새들의
마지막 모습이 눈에 삼삼해서 어쩌다 길에서 새장수를
만나면 애써 눈길을 피해야했다.
이번 일도 전적으로 내 탓이었다.
한파가 몰려온다고 며칠 전부터 신문이며 방송에서
경고를 했는데도 괜찮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이
그만 화를 불러 오고 만 것이다.
지난해 봄.
분홍빛 제라늄이 줄기차게 꽃을 피우는 것을
대견해 하던 남편이 꽃시장에 가더니
주홍과 빨간 꽃이 핀 제라늄을 두 그루나 사왔다.
그리고는 함께 사온 하얀 도자기 화분에
옮겨 심고는 환해진 베란다를 바라보며
무척이나 흐뭇해했었다.
남편은 또 같은 품종을 사왔다며 툴툴거리는
내게 종류는 같지만 새로 산 것은 꽃송이 안에
하얀 무늬가 있어 더 예쁘다며 목청을 높였었다.
변을 당한 제라늄은 처음 사왔을 때 부터
다른 것들보다 잎도 무성하고 꽃송이도 푸짐해서
단단해 보였기에 난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나무를 살려보기로 결심을 했다.
우선 따뜻한 거실로 화분을 옮겨와
하루에도 몇 번씩 병문안을 하며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그러나 죽음의 문턱까지 가버린 화초는
쉽사리 마음을 열려고 하지않았다.
오히려 줄기끝이 바삭하게 마르기까지 해서
아무래도 회생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보름쯤 지난 어느 날.
가지 한귀퉁이에서 보일 듯 말 듯
쌀알만한 잎이 돋아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참으로 끈질긴 생명력이었다.
그날 이후.
하루가 다르게 가지마다 새록새록
잎이 돋아나고 뿌리 근처에선 또 다른
가지가 맹렬하게 솟아올라 큼직한
잎들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오늘.
제일 큰 가지에서 앵두만한 꽃봉오리가
두 개나 맺혀있는 것을 보았다.
모진 역경을 이겨내고 나무는 스스로의
힘으로 자랑스럽게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다.
얼었던 가지들이 싱싱하고 푸른 잎으로 채워지는 것만도
고마운 일이거늘 이렇게 꽃까지 피우게 될 줄이야.
난 기적적으로 소생한 나무가 너무도 사랑스럽고
고마워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아!
세상에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다 아름답다.
그리고 죽음같은 고통을 이겨낸 모든 것들은
더 더욱 아름답다.
눈물겹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