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 제목은 바로 울 친정엄마 별명이다. 것두 딸들이 만장일치로 붙여준....
대충 짐작하시겠지만 울 엄만 여기 들어오신 분들이 그리워하는
그런 아련한 기억속의,자기 희생속에서 자식을 감싸주는 그런 따뜻하고
한국적인 엄마는 아니었다.
내가 중학교 시절에 친구집에 놀러가서 눈이 휘둥그레지도록 놀란적이 있었다.
저녁때가 되었는데 친구 엄마가 저녁밥상을 차려서 갖다 주신거였다.
나로선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이었으니.....
딸이 넷이라도 울 엄만 어떤 자식의 산후 뒷바라지 한 번 제대로 하지 않았다.
큰 언니 산후는 둘째언니가 했고,
나머지 언니들은 내가 늦게 까지 결혼하지 않고 있었던 탓에
어쩌다 보니 다 내 몫이 되어 버렸었다.
거기다 또 체면은 얼마나 지키시는지 큰 며느린 자기가 한대놓고 나 시켜먹었으니...
지금 생각해도 울 엄마는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자랄때도 그랬고 커서도 그랬고 ,딸들이 결혼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결혼해서도 힘들었다.
울 아버지는 조선시대 사고방식이 몸에 배었고, 권위적이었고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이었으니, 울 엄마랑 아버진 맞는게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선지 내가 기억하는 한 울 부모들은 사흘드리 싸움밖에 하질 않았다.
것두 한번 붙으면 싸움도 연속극으로 할 수 있는 싸움에 관한한
도가 튼 사람들이었다.
그 싸움이 끝 날때 까지 울 엄만 그길로 살림살이와는 담을 쌓고 고사리 같은
어린 손으로 큰 언니가 한 밥을 다 들 말없이 받아 먹었다.
그런 일들은 언니들이 다 출가하고 막내인 나에게까지 물림으로 내려왔다.
난 남들이 다들 가족의 관심을 받으며 고3을 지낼 때도 집에선 밥하고
때로는 아버지,엄마, 심지어는 오빠들의 스트레스 해소의 대상이 되면서
지내야했다.
난 우리 집에서 제일 약자였고 그들에게 가장 손쉬운 상대였으니까....
어떤 날은 부모들 싸움을 말리다가 얻어터지고,
화 난 엄마 눈치 덜 본탓에 얻어터지고,
열받은 오빠들 비위 못맞춘 덕에 얻어터지고,....
그렇게 내 어린 날과 성장기는 지나갔고 난 삶의 무게에 짓눌려서
남들이 소위 말하는 사춘기조차도 느낄 여가 없이 성장해 버렸다.
그리고 어느 날 돌아보니 난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데
내 영혼은 부유하며 쉴 곳을 찾고 있었다.
성장이 채 끝나기도 전에 너무 많은 폭력에 시달려온
내 영혼과 육신은 그렇게 시들어 가고 있었고,
내 모든 것들은 병들어 있었다.
난 아무런 미련이 없었고 쉬고 싶단 생각밖에 다른 생각이 없었다.
힘든 영혼도 힘든 육신도 쉬게 해 주고싶었다.
잠을 자고 싶어도 불면증이 달라 붙었고,
어쩌다 선 잠이라도 든 날은 악몽에 시달려 집이 떠나가라 비명을 지르며
일어나기를 하룻밤에도 서너번씩.....
그렇게 일어난 밤에는 숨만 쉬어도 누군가가 나를 잡아 갈것 같아서
식은 땀을 흘리며 밤새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입은 들어붙어 실어증 초기 증상이었다.
눈이 퀭해졌고 혀가 말려 들어갔지만 누구도 날 눈 여겨 보지 않았다.
다들 자기의 생존이 더 급박한 탓이었다.
그냥 내가 원하는 건 쉬는 것뿐이었고, 난 쉬기위해
약을 먹었다.혹시라도 하는 마음에 난 양주도 반 병 쯤 털어넣었다.
그러나 삶은 날 그냥 가는 걸 두고 보지 않았고
난 다시 깨어났다.
..
그렇게 가족을 못살게 굴던 아버지가 세 번째로 쓰러졌다.
그의 대 소변을 받아 낼 사람은 가장 핍박받던 엄마와 나였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남은 재산을 정리하여 갈데 없는
엄마를 내 곁으로 데려다 놧다.
깔끔떨고 까탈스러운 성격에 세상살이라곤 세금 내는 일도 못하는,
은행에 돈이 있어도 현금이 없으면 굶어죽을 엄마였다.
그렇게 키운 딸들이 주는 생활비로 사는 울 엄만 그래도 대왕대비다.
당신이 한 일 중에서 자식들에게 잘못한 건 다 잊어버리고
언제나 자신은 자식들을 위해 그 별난 아버지 밑에서
고생하고 희생당해도 견뎌냈다고 스스로를 장해 하시면서살고 계신다.
언니들이 어쩌다 섭한 말 한마디 할라치면 지금도
큰소리친다 "너 앞으로 오지마"
..
내가 그들을 불행한 한 시대를 살아온 한 남자로, 혹은 한 여자로
이해하게 된건 아버지의 대 소변을 받아내면서 였다.
그렇게 독불장군이던 아버지, 그렇게 잘난 척하던 아버지가
종이 조각처럼 누워서 미안한 눈빛을 하는 걸 보면서
난 비로서 한 시대의 희생자로서의 아버질 보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변해버린 세대와 그보다 더 빠리 변해 버린 정신들,
그 시대 속에서 이리 저리 치이고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 모른채
그냥 자식들 밥만 배불리 먹이면 다 된것 같았던 세대들,
난 그가 떠난 후,
내 엄마도 한 여자로 더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
엄마로 보면 울 엄마는 자식들에게 많은 원망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다.그러나 한 여자의 인생으로 보면 이해되는 부분들이 많아진다.
여자로서 가지고 싶었던 많은 행복들이
그 당시의 세대에서는 용납되지 않았으니......
그런 세대에서 작은 여자의 행복을 바라는 건 결국 죄악이었던 거였다.
..
우리의 대왕대비마마는 자식들의 핍박(?)에도 여전히 당당하다.
그녀가 당당할 수 잇는 이유는 딱 한가지다.
다른 집과는 달리 우리 6남매를 나이 차이가 지지않게 낳아서
짝까지 지워줘서 잘 놀게 해 줬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 상처를 많이 지우지 못하고 살지만
다들 그 한가지로 하여 그녀를 대왕대비마마로 대우하여
수렴청정을 하도록 인정해 준다.
그리고 나는 거기에 한가지를 더한다.
내엄마를 통하여 난 내 속에 사람을 사랑하는 능력이 없다는 걸 알게되었고,
그걸 알기에 누구든지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인간이 되었다는 것......
울 남편 표현에 따르면 난 참 차가운 사람이지만 그는 알고 있다.
최소한 내가 그들을 사랑하려고 언제나 노력한다는 것을.....
그래서 때론 봄바람이 된다는 것을.....
그래도 난 두렵다.
혹여 내 딸들이 냉정한 자기 엄마를 눈치 채게 될가봐......
그래서 죽자고 노력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