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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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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식구 겨울여행


BY 개망초꽃 2005-02-16

 아이들과 여행을 가자고 남편에게 전화가 왔을 때 알았어 대답을 해 놓고 막상 같이 갈
 생각을 하니 며칠동안 잠을 설쳐야했다.

 구정 다음날 새벽, 남편은 엄마네 집 앞에 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었다.
 눈치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이혼 전 내가 앉았던 앞 자석엔 아들아이가 먼저 가 앉았다.
 다행이다.
 딸아이 더러 운전석 뒷자리로 타라고 하고 난 아들아이 뒤쪽에 앉으며
 “이 자리가 제일 편 해.”
 아무도 묻지 않는 말을 했다.

 감잎차를 담고 따라 마실 플라스틱 컵을 물통 주둥이에 씌우고 사과 쥬스를 2개씩
 마시게 여덟 팩을 준비했다. 엄마가 한과를 비닐봉지에 담아주고 귤과 사과를 씻어
 커다란 비닐봉지에 넣었다.
 새벽에 출발해 그날 밤에 돌아올 여행이기에 준비할 건 간단하고 간편했다.

 명절이라고 해 봤자 우리 세 식구는 갈 곳이 없었다.
 엄마네로 결혼한 막내 동생 내외와 일곱 살 난 조카가 명절 전날 왔다가 그 다음날
 떡국 한그릇 먹고 가면 남아 있는 우리 식구는 본래적으로 돌아가 쓸쓸했다.
 아이들은 텔레비전 채널이나 돌리고 컴을 붙잡고 오락이나 하고 또 그렇게 명절의
 이틀을 보내야겠구나 했었는데, 동해 바다에 들렸다가 설악산 가자고 아빠가 그러드라
 했더니 아들아이가 좋아서는 “스케줄이 바쁘겠네.” 했다.
 네가 무슨 연예인이냐며 동생이 무안해 할 정도로 딸아이는 손뼉을 치고 큰소리로
 웃으며 친구들이랑 바다가고 싶었는데 잘됐다고 덧붙였다.

 동해쪽으로 차의 방향을 잡으니 해를 마주 보게 되어 눈이 부셨다.
 남편은 시간만 되면 식구들을 여행가방과 함께 챙겨 동해로 떠났었다.
 많은 시간들을 대관령의 낙엽송과 마주했고, 안개 낀 한계령을 기어 다녔고
 미시령 고개에선 미끄러져 떨어질 뻔했었고,
 봄날 진부령고개 밑 시골집 돌담엔 복사꽃이 흐드러졌었다.
 아들아이가 대여섯 살 때 동해로 넘어가는 고갯길을 마지막으로 갔었으니 칠팔년 만에
 이 고갯길을 다시 넘어 가는 게 되었다.

 대관령으로 가는 길은 곡선은 없어지고 직선과 터널로 이어져 있었다.
 터널로 가는 길이 이어지고 또 이어져 현실을 떠나 미래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 같았다.

 바다가 보이는 기차역, 정동진의 모래밭에 서 있었다.
 햇볕은 강했지만 바닷바람에 손끝과 발끝과 코끝이 시렸다.
 남편과 나의 끝이라는 옛일이 시렸다.
 이른 오전이라 네 식구 그림자가 길다.
 그림자는 넷이 나란히 서 있지만 내 마음은 따로 서서 멀찌감치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차 안에서부터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팔짱을 끼고 다녔다.
 남편과 개인적으로 할말이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은 전화가 오면 했지만 얼굴을 보면 할말이 없어진다. 정신차리며 살고 있어
 라든가 돈은 잘 벌고 있냐고 묻든가 앞으로 어떻게 할거냐고 말하지 않았다.
 각자의 생각으로 이해를 도왔을 뿐 서로 침묵하는 게 도와주고 이해해 주는 게 되니까.
 또한. 아이들을 위해 여행을 챙겼으니 아이들 편하게 기분 좋게 해주는 것이
 지금 우리 둘의 몫이고 책임이라는 걸 남편도 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해안도로를 따라 바다를 보고 거센 파도를 만나다가
 대포항에 들려 아이들이 먹고 싶어 하는 킹크랩 한 마리를 골랐다.
 한 마리를 가지고 서로 양보하느라고 뭘 먹었는지 모르게 배가 불렀다.
 네 식구였을 때도 먹을 걸 앞에 놓고 양보를 참 착하게 했었다.
 내가 찬밥을 먹으려 하면 남편이 빼앗아 먹었고
 맛있는 게 있음 아빠 먹을 걸 꼭 남기고 아이들은 먹었다.
 양보 하느라고 느려져 식어가는 게살을 먹으면서 생각했다. 그런데 우린 왜 헤어져 사는 걸까?

 한계령 고개를 넘기 전 오색약수터에 들렸다.
 주전골로 들어서면서 눈은 길을 만들었다.
 아들아이는 계곡 가장자리 아무도 밟지 않는 생크림케익 같은 길을 걸어 다녔고
 딸아이는 운동화 바닥이 오래 돼 미끄럽다고 기다시피 산길을 올랐다.
 혼자 걷다보면 어느 사이에 딸아이가 옆에 매달려 있고 어느 순간엔 아이들은 어디로
 갔는지 안 보이고 남편과 내가 둘이 되어 걷기도 했다.
 아이 둘은 눈싸움도 하고 목덜미 속에 눈을 집어넣고 민망한 정도로 소리를 지르고 달아나고,
 산행을 하던 사람들이 다 큰 제들이 왜 저러나 흉을 봤겠지만 그냥 뒀다.
 애초부터 남의 눈치를 너무 보던 아이들인데...
 남달리 좋아하는 자연 속에서 네 가족이 됐으니 속으로도 겉으로도 들뜨고 우쭐하고
 싶었을게다.

 “우리 다시 합쳐서 살아요.” 이런 말 아이들은 한번도 안했다.
 딸아이는 성인이 되어가고 있어서 그런지 자기는 상관없는데 사춘기로 접어들
 동생을 걱정하긴 했다. 아빠랑 같이 살고 싶으냐고 아들아이에게 물어보지도 않았다.
 나는 엄마로써도 많은 걸 무심하게 넘기고, 무뚝뚝함을 자식에게도 남기고 있다.
 남편은 내게 흘러가듯 물어보곤 했었다.
 “다른 남자에게도 무뚝뚝했어?”

 난 좀스러웠다. 그러나 검약하다고 말해도 옳은 말이긴 하다.
 남편은 나와 전혀 반대로 생긴 굵은 씨앗이다.
 그래서 많이 싸우고 그래서 헤어짐의 원인이 되었다.
 씨앗 생김새로 살아지고 살아야 옳은가보다고 서로 놓아 주었다.
 여전했지만 남편은 아이들 사 달래는 대로 사주고 싶어 했다. 다만 달라진 건 내 눈치를
 많이 봤다. 한계령 휴게소에서 식용유을 발라 반지르르하고 노랗게 구운 찰옥수수가
 진열대에서 돌아가고 있었다. 아이들 눈이 그 쪽으로 동시에 쏠렸다.
 남편은 옥수수를 사주고 싶어 지갑을 꺼내려고 하면서 나를 쳐다봤다.
 옛날의 나는 안 된다고 눈을 흘겼겠지만 한개만 사주라고 했다.
 옛날에 몰랐던 걸 나는 조금씩 알게 되었다.
 씨앗의 크기는 달라도 잎이 나고 꽃이 피고 드디어 열매를 맺으면서 자기 자신이 되었는데
 우린 서로 다르게 생겨 먹었다고 내가 더 잘 생겼다고 우기고 멱살을 잡았고 울부짖었고
 마침내 뒤로 자빠져 떨어져버렸다.
 내 좋아하는 땅에서 나의 개성대로 꽃 피우는 게 나는 편하다.
 하지만 남편은 아닌가보다.
 가끔씩 외롭다고 문자를 치고 보고 싶다고 술기운을 핑계 삼아 전화를 했다.
 "먹고 살기 바빠서 난 몰라. 외롭고 보고 싶고 그런 거 사치야.“
 그러면 남편은 한동안 연락이 없었다.

 저녁 노을이 한계령 도로에 자욱하게 번졌다.
 내린천 강 위에 사람들이 물떼새들 같았다.
 강가에 얼어붙은 자갈돌 같았다.
 빙어를 잡기위해 사람들이 몰려 있던 풍경에 우리도 같이 몰려 그 풍경에 흡수되었다.
 얼음판이 된 강은 견딜 수 없이 추웠지만 사람들은 얼음구멍을 냄비 만하게 뚫고
 그 곳에 낚시줄을 길게 내려놓고, 얼음조각처럼 반짝이는 빙어가 걸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삶은 기다림의 연속인가...
 어떤 아이들은 반쯤 앉는 신식 앉은뱅이 썰매를 빌려 타고,
 어떤 가족들은 말 썰매를 타고 얼음판 위를 질주하고 있었다.
 물론이다, 우리 아이들도 아빠가 빌려 준 신식 앉은뱅이 썰매를 타고서 사람들이 잡아 논 빙어를
 기웃기웃 구경하러 다녔다.

 짧은 하루였지만 바다 앞에 서서 멀리서부터 달려오는 파도를 구경했고,
 설악산 눈길을 걸어 쇠 냄새가 역겨운 약수 한 바가지씩 마셨고,
 강 위에 서서 강바람을 알싸하게 맡았다.

 아이들의 웃는 소리가 굉장히 컸다.
 남편은 가족의 소중함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내 마음의 뚜껑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이렇게 각자의 생각을 안으로 끌어 안으며 겨울의 하루는 저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