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메아리
그림이
여동생 남편이 기관장으로 승진되었다는 내용이 신문에 발표되자 친정 어른 분들로부터 축하 전화가 나에게도 연이어 왔다.
" 제부가 기관장 발령이 나서 반갑제, 엄마가 계셨더라면 얼마나 좋아하실까. 그게 다 엄마의 공덕이다."
한목소리로 축하해 주는 전화 내용이 오래전에 가신 어머니를 연상해 줌은 계실 때 집안간에 어머니가 베푸신 사랑을 잊지않고 딸인 나에게 그 자리를 기억해 주신다.
일하는 사람을 데리고 시집온 부잣집 막내딸로 자라 신학문을 배운 당시의 신여성 이셨던 어머니. 갑자기 기울어진 신랑집의 가세를 모르고 중매한 교장선생님이 미안해 하셨지만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몰락한 지방토호의 빈 껍데기인 우리집으로 시집을 오셨다.
기울어진 양반댁 자존심은 죽을 먹어도 일할 사람을 두는 상황을 간파한 어머니는 어른들과 의논해 엄마가 데리고 온 사람도 집에 부리던 사람도 과감히 내보내고 남이 부치던 논밭을 거둬 가족이 합심해 직접 농사 짓기를 강요하신 당찬 새댁이였다고 한다.
30년대 재봉틀이 재산목록에서 우선순위일 때, 외가에서 해주신 재봉틀은 우라 가족의 삶의 수단이 되었다고 하셨다. 털 바느질은 내가 어릴 때 밤낮으로 듣는 소리였다. 눈으로 보시면 무엇이든지 할 줄아시는 어머니는 특히 바느질이 뛰어났다. 어릴 때 시골에서 보기 드문 원피스, 주름치마, 불라우스등을 예쁘게 해입고 학교에 가면 광목 삼베 치마 저고리 바지 저고리를 입던 친구들이 부러워했다. 엄마의 이런 노력이 계속되자 흩어졌던 가족들 마음이 하나로 묶어져 영양제 구실을 하였다.
할머니께서는 남에게 어머니를 늘 우리 보배라고 햐셨다. 부잣집 딸이 좌절하지 않고 팔을 걷어붙이고 현실에 적응해 집안을 일으키신 어머니에 대한 배려라고나 할까, 아들 형제를 두신 할머니는 삼촌이 육이오에 전사하셔서 며느리 사랑은 유별하셨다.
나는 결혼 후 " 엄마는 어쩌면 그렇게 할아버지 할머니께 잘 보이셨어요."라고 물었을 때 엄마의 대답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보통며느리 이상으로 한 것이 없지만 받아들이는 할머니, 할아버지께서는 나의 좋은 쪽만 보시고 칭찬해 주시고, 대소가에 가서도 그러시니 자연 동네 어른분들도 나를 추켜 올려주셨기 때문에 나는 더 열심히 노력하게 되었고 아버지도 이런 나를 고마워하다 보니 가족은 화목했고 사랑은 사랑을 낳아 없는 가운데도 행복함을 느꼈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가시고 우리 삼 남매를 결혼시킨 후에도 새 농민 월간지를 받아보시면서 농사를 지어셨기에 농사와 양봉에 대한 지식을 이웃에 전수하기도 하셨다. 오빠는 이러시는 엄마가 안타까워 농사는 남에게 맡기고 편한 노후를 보내시라고 권했지만 도회지에 사는 대소가에 나눠 주고 너희에게 주는 것도 내 기쁨이라면서 추수가 끝나면 손수 포장해서 곳곳에 부치셨다. 삼종 조모댁 며느리는 택호를 몰라 부쳐온 사과상자가 잘못 온 것이라고 반품하려고 했다는 일화도 있었다.
우리 남매가 제법 틀을 잡고 살 무렵, 농사일을 끝낸 어느 해 가을 카톨릭 제단 양로원에 대형 세탁기와 냉장고를 사서 보내려고 제법 많은 돈을 장만해 오셨다. 그때 나는 입이 툭 튀어나왔다.
당신을 위해서는 버스값도 아끼시는 어머니께는 너무 큰돈이기에 반만 주자고 권했다.
혼자 벌어 사는 동생에게 좀 주지 않는 엄마가 이해되지 않았다. 나의 뜻을 읽은 어머니는 너희들은 이만큼 살면 됐다. 공무원은 나라에서 먹고 살만큼 준다. 큰 잘못이 없으면 애들 공부시키면서 살 수 있다는 게 어머니의 지론이셨다.
제부가 기관장으로 발령을 받고 나서 '엄마가 계셨더라면' 하는 친척분들의 전화를 받으니 물질적으로는 더 풍요한 삶을 누리면서 엄마의 본보기를 따르지 못한 나 자신이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