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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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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 왜 그렇게 말했던가


BY 그림이 2005-01-26

    술 ! 왜 그렇게 말했던가?

그림이 
술! 나는 결혼조건의 첫 번째는 술을 잘 못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여럿 앞에 종종 말 했다. 술을 잘하면 패가망신이라도 하는 것처럼 여긴 철없었던 처녀시절 술이 내 생활에 올가미를 씌운 것도 아닌데 술 먹는 사람이 싫었다.
기억 저편 초등학교 2-3학년 때라 기억된다. 두 어살 위인 집안 아지매와 냇물에 멱을 감고 강변을 따라 집으로 오는데 친구 아버지가 비틀거리면서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겁에 질린 나를 보고 곁에 섰던 사람이 오지 말고 가란다.
그 길로 나는 정신없이 달리다 엎어졌다. 아픈 줄도 모르고 다시 달리는데 따라오던 아지매가 "교야 다리에 피가 난다. 이제 괜찮으니 우리 집 가자"
그때야 내려다보니 다리에 흘러 내려온 피는 고무신에 흥건했다. 고무신을 벗어 쥐고 울면서 가까이 있는 아지매 집까지 가서 응급처치를 하고 집으로 왔다.
상처를 보신 아버지께서는 매우 놀란 기색을 지으셨다. 비상약으로 사둔 다이야찐 가루약으로 치료해 주시면서 물이 들어가면 낫지 않으니 멱을 감지 말라고 당부하셔서 한참 동안을 냇가에 앉아 물속에서 노는 아이들을 부러워했다. 지금도 중위 계급장처럼 남은 흉터는 그때 일들을 생생하게 기억해준다.
술 취한 사람을 집에서 못 본 나는 한참 큰 후에도 술에 취하면 시비를걸고 싸우고 광기를 부리는 줄만 알았다
60년대의 마자막 해가 끝나갈 무렵, 시골서 9년을 함께 공부한 남자친구가 퇴근 시간쯤 직장으로 전화가 왔다. 말년휴가 왔다 귀대하는 길이라면서 밤늦은 기차표를 예매 해뒀기에 시간이 있어 만나고 싶다고 했다. 왜일까? 우연히 버스에서 만났을 때 사촌형을 소개해 줄까 라고 얘기한 적은 있지만 확실한 말은 오가지도 않았고 연락도 없었는데 뜬금없이 만나자니 망설여졌지만 나가기로 했다.
역근처 2층에 위치한 찻집 문을 여니 손님이 별로 없어 군복은 금방 눈에 띄었다. 맨 안쪽 자리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케롤이 다방 안에 감미롭게 흩어져 아듀 60년대를 서둘러 알려준다.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내가 자리에 다가갈 때까지 그 자세가 부동이다. 인기척을 하니 화들짝 놀란 자세로 벌써 왔니 하면서 반갑게 맞는 음성에서 술냄새에 예민한 내 코는 그가 한잔 했음을 알 수 있었다.
간단한 안부가 오갔고 휴가 중 시골 이웃집 중학교선생님 부인이 자기 동생과 혼인 말이 있는 나에 대해서 혹시 알고 있나고 묻더라고 했다. 그 부인은 남편을 통해서 출신학교 나의 생활기록부까지 확인한 상태지만 인성에 대해 묻는다기에 좋은 말만 해줬으니 한턱내란다. 신랑감 될 사람 사진도 봤다면서 일류대학 출신에 직장도 좋은데 다니더구나
너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 다 좋다고 얘기해놓고는 내가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어 대구에 나와 시내에서 한잔하고 시간 맞춰 전화했다는 게 요지다. 며칠 전 집안 아지매 소개로 선본 남자의 누나가 하필이면 내 친구께 물었을까.
학교에 다닐 때 친구는 공부도 잘하고 통솔력도 있어서 반장을 자주 했다. 가정형편을 간파한 후 야간학교를 선택했고 졸업 후 혼자만 살겠다고 객지생활을 할 게 아니라 부모님 모시고 고향에서 터전을 잡고 살 거라고 결심한 고향지기다. 여러 남매 맏이인 그는 무거운 짐을 자청했다.
완고하신 우리 아버지, 초등학교 동창회가 열린다는 통지가 오면 내 손에 오기도 전에 가지말라고 하시면 나는 가지 않았다. 학교가 동네 복판에 자리 잡고 있기에 동창회 때 젊은 남녀가 학교주변을 어울려 다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셨다. 어느 한해는 친구가 동기회장으로 내가 부회장으로 작성된 통지서를 가지고 사랑에 와서 아버지께 허락을 구하는 친구 말을 듣고 아버지는 보내주셨다. 그만큼 아버지도 믿고 사람됨을 좋게는 평가하셨다.
그러나 사윗감으로는 아니라고 행여라도 그런 말이 있으면 아니라고 분명히 하라는 말씀하셨다. 어려운 형편과 여러 남매 맏이가 딸의 짝이 될 수 없다는 말씀이다. 이런 말이 있은 후 얼마 있다가 그날 찾아왔다.
맨정신으로 못하고 한잔하고 한다면서 단도직입적으로 결혼을 하잔다. 가족이 모두 나를 좋아하고 우리 아버지께서도 너의 아버지께 언질을 드렸다는 말을 했다. "우리 둘의 생년월일로 사주도 보니 너무 좋다고 하더라."
듣고 있는 내 다리가 후들거렸다. 아버지 말씀을 별로 거절해 보지 않았던 나, 싫지 않은 이 남자 말의 대답은 천근이었다. 퇴근시간에 손님도 있을 법도 한데 다방 안은 볼륨 낮은 케롤 소리만 더욱 무겁게 들려올 뿐 내 입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딸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걱정, 10여 년 동안의 마음속 묻어두었던 사랑을 고백하는 내가 좋아한 이친구, 깊은 땅속으로 꺼지고 싶은 심정이다.
한참 후 엉뚱한 나의 대답
"너의 가족이 생각하는 만큼 나는 착하지도 않고 네가 알다시피 나는 칠칠 받지
도 못해서 맏며느리로는 합당치 않아. 너는 틀림없이 좋은 사람을 만날 거고 술 이 깨면 후회할 거야. "
"아니야, 나는 이성을 잃을 만큼 술을 먹진 않았어. 다만, 용기를 내기 위한 한잔
이었어 그래 내 욕심인 줄은 알아 예견은 했지만 네 말을 듣고 싶었어. 원망은 않을게."
눈물이 고였다. 내 맘속 눈물은 홍수처럼 흘렀지만 억지로 참고 찻집을 나왔다. 내가 사겠다는 저녁을 한사코 친구가 산다기에 저녁 먹고 남는 시간에 그때에 극장가를 휩쓴 부배의 연인을 키네마에서 봤지만 지금도 그 내용은 기억할 수 없다. 청혼을 거절하고 대구역에서 헤어진 후 택시를 타고 집에 왔지만 그날 밤은 하얗게 새었다
며칠 후 직장으로 군사우편이 찍힌 친구의 편지가 왔다. 내 욕심이 네가 고민하지 않나 하고 편지를 쓴다. 우리 둘은 친구이다 . 내가 할아버지가 되고 네가 할머니가 되는 그때까지 영원한 친구이기를 바라고 나는 친한 친구를 잃고 싶지 않다는 대략 그런 내용으로 기억된다.
결혼 후 바쁜 생활은 그를 잊었고 친정 나들이 때도 만나게 될 까봐 의도적으로 그 집을 비켜갔다. 그가 결혼 얼마 후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맏이로서 소임을 잘 하고 착하고도 고운 아내를 맞아 동생들에게 존경받으면서 잘 살고 있다는 소문은 고마웠다.
오십이 넘어 초등학교 동창회가 30년이 훨씬 넘어 열렸다. 오랜만에 모인 친구들 사이엔 어려웠던 시절의 철없이 좋아했던 이야기가 오갔다. 설명을 한참 한 후에 옛 이름을 기억하고 그때의 일들로 웃었다.
그날 이후 처음 만났다. 많은 세월이 흘러 젊었을 때 감정은 추억일 뿐 친구로서 반가웠다. 동창이 다 모인 자리에서 꼬였던 감정을 이야깃 거리로 풀어준다. 무조건 좋아했던 나에 비해 앞날을 계산할 줄 아는 친구는 친구 이상으로 생각하지를 않더라고 내 감정을 들여다 본 듯 얘기했다.
부모님께 대한 효도와 애써 감추고 내뿜지 못한 사랑을 두고 오랫동안 속앓이를 한 다른 한 면을 어찌 볼 수가 있었을까? 나도 살아오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는 놓친 사랑을 그리워도 했고 계산된 사랑을 후회할 때도 있었단다. 술을 못하는 사람도 다 좋은 것은 아니더구나 마음속으로만 대답해 주었다. 삼십 년 전 아득한 일인데도 얼굴이 화끈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