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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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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밭 사잇길로...★


BY 이쁜꽃향 2005-01-23

카톨릭 신자가 되고나서부터 일요일이 바쁘기만 하다.

예전 일요일엔 열두시가 다 되도록 늦잠을 자고 아침은 건너뛰기 일쑤였다.

父子간에 배가 고파 견디다 못해 늦은 아침을 마련하여 잠을 깨우면

오늘만은 내 마음대로 늦잠 좀 자게 해 달라고 신경질을 부리던가

아니면 마지못해 함께 식사를 하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요즈음 주일엔 성가대 단원으로 활동해야 하니

늦잠을 마음대로 잘 수 없는 건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보다 삼십분을 먼저 가서

성가 연습에 참여해야만 한다.

라이프사이클을 하루 아침에 바꾸기가 영 쉽질 않아서

처음 몇 달간은 짜증도 나고 일요일 아침엔 늦잠과의 전쟁이었다.

 

습관이란 자신도 모르게 몸에 배이는 법...

처음엔 남편이 날 깨우느라 실랑이를 했었는데

이젠 거꾸로 내가 먼저 일어 나 남편을 깨우기에 이르렀다.

'성당 안 갈거야??

늦게 가면 단원들에게 미안하니까 빨리 일어나~'

 

미사가 끝나고 나면 단원들끼리 점심을 먹기 위해 으례히 가는 장소가 있다.

'보리밭 사잇길로'.

성가대 지휘자인 선배 언니네가 운영하는 카페 겸 음식점이다.

수년 전, 목포에서 영암으로 가는 한적한 시외 도로변에 그 카페가 등장했을 적엔

많은 연인들의 만남의 장소로

한창 감수성 예민한 숙녀들에게 모임 장소로 인기가 최고인 곳이었다.

아마도 거북이 등같은 지붕을 하얗게 장식한 특이한 외양과

주변의 시골 풍경, 실내의 색다른 인테리어와 통유리를 통해 바라볼 수 있는

호수가 인상적이어서였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운 좋으면 선배부부의 생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녀의 남편은 작곡가이다.

우리가 대학때 열심히 불렀던 '모모는 철부지...'라는 노래도 그의 작품이다.

맨 처음엔 낯선 성가대 단원들과의 합석이 매우 불편하여

한쪽에 오두마니 침묵을 지키며 앉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느 순간 식탁에서 그들끼리 즉석에서 멋진 화음을 이루며

아카펠라로 아름다운 합창을 하는 게 아닌가.

귀가 번쩍 뜨이며 가슴이 울렁거리기 시작하였다.

음악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인 나로서는 신선한 감동이었다.

어떤 노래든지 그들이 입만 벌리면 사부합창이 이루어진다.

분위기가 무르 익으니 선배는 피아노를, 그녀의 남편은 통키타를 치며

포크송, 팝송, 클래식 등 장르를 불문한 아름다운 노래들이 실내에 울려퍼지기 시작한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술잔이 돌기 시작하면 모두가 '건배송'을 한다.

선배가 '술~' 첫음을 떼면 거침없이 아름다운 화음이 이루어지고

건배송이라 하기엔 너무나 아까운  짧은 합창이 이루어졌다.

그 시간엔 대부분 남성 성가대 대원이 많은 지라 굵직한 무게감을 느끼게 하는

유난히 멋진 중후한 합창을 감상할 수 있다.

 

그 재미에 맛들려 일요일 점심이 점점 즐거운 자리가 되었다.

여성 단원들은 대부분 귀가해 버리고 부부성가대 단원은 딱 두 쌍 뿐이라

몇 안되는 여자들 중 하나인 나는 점점 그 자리의 중심이 되어 갔고

선배는 사랑하는 후배라는 이유를 내세워 자주 나를 무대로 불러 세웠다.

즉석에서 생음악을 하는 곳이니  우리 말고도 다른 손님들이 많이 있는 곳이지만

모두들 그 분위기를 즐기는 모습이다.

선배 남편의 멋진 라이브와 더러는 부부간의 듀엣을 즐겨 감상하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무대에서 부르기도 하면서 이젠 그 분위기에 합류하게 되었다.

 

사실 곰곰 생각해 보면 성가대 단원이 아니었다면

일요일 점심 시간에 그렇게 즐거운 분위기에서 식사할 기회가 별로 없었을텐데

성가대 봉사를 하게 되면서 일요일 하루를

정말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즐겁게 보내게 되었으니

이것이야 말로 복 받은 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참석자들에게 각자 만원씩 걷어 식사대를 지불하니 부담도 되질 않고

단원들끼리 서로 아끼고 가족처럼  챙겨주는 모습을 보면서

아름다운 작은 사회를 보게 되는 것같다.

 

보리밭 사잇길로.

그 입구에 서면 저절로 콧노래가 흥얼거려 지는 곳.

혹시라도 지나시는 길이거든 한 번 들려보시구려.

오후 시간대엔 즉석에서 작은 음악회가 열리는 곳.

그곳에선 외롭고 지친 영혼들에게

신선한 기쁨을 주는 마력이 숨겨져 있는 것 같더이다...^^

그 분위기에 합류하다 보면 저절로 어깨가 들썩여지고

함께 흥에 겨워 노래를 따라 부르게 되니 온갖 시름이 삽시간에 사라져 버린다오...

 

아마도 올봄엔 그 카페 주변의 밭에 심겨진

새파란 보리들이 오는 발걸음을 반겨줄지도 모르겠소.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부르는 소리 있어 발을 멈춘다...

저절로 그 노래가 흥얼거려지게 되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