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나 수술 하기 싫은데...
조금 아쉽긴 하지만 이만하면 살 만큼 산 것 같기도 하고 말이야..."
수술하기로 날 잡아 입원을 해 놓고 여편은 또 딴소리다.
여편의 고집을 아는 남편은 가슴이 철렁하다.
피를 토하면서도 약 먹기 싫다고 치료를 거부했던 사람이다.
남편이 아프다고 해도 여편은 꿈적도 안하는 사람이다.
인정머리 없이 그냥 참으라고 한다.
감기 몸살에 무슨 약이냐고 남편이 약을 사다 먹는 것도 못마땅해 한다.
집에 가정상비약이 필요하다는 것도 모른다.
남편이 필요하다 싶어 사다 놓으면 몰래 쓰레기통에 버린다.
약이 독이라고 굳게 믿고 사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하는 말이니 그냥 실없는 어리광이나 투정으로 해보는 소리가 아닌 것을 남편은 안다.
여편이 비정형성 결핵이라는 병을 앓기 시작한 것은 이 년이 되었다.
처음에는 원인을 찾지 못해서, 나중에는 여편이 치료를 거부해서, 남편의 속을 태웠다.
여편이 순순히 수술에 동의 했을 때 남편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데 이제와서 또 억지다.
여편이 앓는 결핵은 다른 결핵과 달리 전염병이 아니라고 하였다.
소인지 새인지 하는 동물에게 걸리는 병인데 모든 면역기능이 없어진 사람에게 걸리는 경우가 간혹 있는 병이라고 하였다.
말기 에이즈 환자 처럼 몸이 한없이 약해진 사람이나 걸린단다.
여편은 건강한 사람이다.
감기, 몸살, 두통, 치통, 배탈, ... 이런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하긴 그래서 처음에 병의 원인을 찾기가 더욱 어려웠다.
남편은, 그 병이 견디기 힘든 정신적인 고통이 원인이 되었을 수도 있다고 하던, 동생의 말이 떠올랐다.
의사인 동생의 말이니 맞는 말일 것이다.
남편에게 여편은 철딱서니도, 생각도, 없는 사람처럼 보일 때가 많았다.
노냥 히히하하 웃길 좋아하고 장난을 좋아해 그런 줄만 알았다.
동생의 말을 듣고 보니 여편이 그리 철없이 사는 것 같았어도 마음으로 많이 힘들었던가 보다.
하긴 여편이 힘들어 할 때도 있었다.
남편에게 자기와 살면서 힘들어 하던 여편의 모습이 영화필름처럼 떠올랐다.
치료를 거부하는 여편이 자기와 같이 사는 것이 힘들어 그러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수술하기 위해 입원 준비를 하면서 여편은 책을 몇 권 챙겼다.
평소 좋아하던 꽃, 나무, 정원에 관한 책이다.
그 책을 보면 입원해서 이런 저런 검사를 하면서 기다리는 동안의 무료함을 잊을 수 있어 좋았다.
책 속의 아름다운 정원에 서 있는 나무와 활짝 핀 꽃들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자기도 그렇게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술하기 전 날, 의사는 남편에게 수술의 위험성에 대해 설명을 했다.
모든 수술을 하기 전에 의례적으로 하는 말인 줄 알면서도 그 말을 듣는 동안 남편은 여편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실로 돌아 온 남편에게 책을 보고 있던 여편이 말했다.
"여보, 수술하다 마취에서 못 깨어나는 사람도 있다던데, 나도 그러면 어쩌지?"
"그런 일이 뭐 흔한가? 쓸데 없는 걱정 하지마!"
남편도 편안한 마음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위로했다.
"여보, 사실 난 죽어도 별로 섭섭할 것이 없는데 딱 하나 마음에 걸린다."
"그게 뭔데? 말 해 봐!"
지은 죄가 많은지라 남편은 찔리는 구석이 많다.
"아이들도 그만하면 다 자랐고, 당신도 능력있는 사람이니 좋은 여자가 생길 것 같고, 울부모도 돌아가셨으니 걸릴 것도 없고, 별로 오래 살고 싶은 욕심도 없고, 그래서 그냥 수술 받다 죽어도 미련은 없어. 그런데..."
"그런데?... 무엇이 걸리는지 다 말해..."
평소 무뚝뚝한 남편이지만 지금은 솜사탕처럼 부드럽다.
"나 말이야, 산이 하나 있으면 살고 싶을 것 같아."
"산? 갑자기 무슨 산이야?"
"내가 꽃이랑 나무를 좋아하잖아. 그래서 마당이 넓은 집 정도로는 성이 안 차거든... 내 시야가 머무는 곳 모두를 내가 좋아하는 꽃이랑 나무로 채우고 싶어. 그러러면 산 하나는 필요할 것 같은데..그러면 그 산 가득 내가 좋아하는 나무를 심고, 꽃도 심고,... 당신, 내가 먹을 수 있는 꽃에 관심 있는 것 알지? 나무도 어린 순을 먹을 수 있는 나무에 관심이 많구 말이야...아니라도 나물을 좋아하니까 이런저런 나물들도 가득 심고 싶어. 그런데 너무 지나친 욕심 같아서 여지껏 말을 못했거든. 그런데 죽을 지도 모른다고 하니 그게 제일 맘에 걸리네..."
"알았어, 내가 수술하고 나으면 산 하나 꼭 사줄께!"
지금 이 순간에 무슨 약속인들 못하랴...
여편이 살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것만 같은 마음이던 남편은 지키기 어려운 약속을 했다.
수술실로 들어가면서 여편은 남편의 손을 꼭 잡고 웃으며 말했다.
"나 살아 올 테니까 약속 꼭 지켜야 돼!"
걱정 말라는 듯이 남편은 여편이 잡은 손에 힘을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술이 끝나고 회복실로 돌아 온 여편은 말했다.
"여보, 수술하고 나니까 당신이 둘로도 보이고, 셋으로도 보이네...당신이 많아서 좋다..."
미처 제정신이 돌아온 것 같지도 않은데 그 다음은 산타령이었다.
" 당신 실컷 봤으니 됐어. 그만 가 봐...
가서 돈 벌어야 산을 사줄거잖아."
간병인에게 여편의 간호를 맡기고 집으로 가는 남편의 발걸음은 무겁다.
'물려 받을 유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공무원이 무슨 돈으로 산을 산단 말인가?..'
남편은 마지막 순간까지 철없는 여편이 문득 원망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