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李完用, 1858~1926) 한말의 정치가이며 본관은 우봉(牛峰)이며 호는 일당(一堂)으로 불리었습니다. 1882년(고종 19년)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주서(注書)와 규장각대교(奎章閣待敎), 검교(檢校)에 이어 동학교수(東學敎授)와 해방영군사마(海防營軍司馬)를 역임하였습니다. 1881년 육영공원(育英公院)에 들어가 영어를 배운 뒤 1887년엔 주차미국참사관(駐箚美國參事官)으로 도미(渡美)했으며 이듬해 5월 귀국한 후 이조참의(吏曹參議) 겸 전보국회판(電報局會辦), 그리고 외무참의(外務參議)를 역임하였고요. 1895년에는 학부대신(學部大臣)과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이 되었으며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때는 친러파로서 외부대신과 농상공부대신 서리를 겸직하다가 1901년 궁내부 특진관(宮內部特進官)으로 있었습니다. 그로부터는 다시금 친일파로 변절하여 1905년 11월엔 을사조약의 체결을 지지하고 솔선해 서명함으로써 그 유명한(!) '을사 5적신'(乙巳五賦臣)의 한 사람으로 지탄을 받았습니다. 결국엔 통감(統監)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추천으로 내각총리대신의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이상이 천하의 매국노 이완용의 개략적 이력입니다. 이같은 대표적 매국노인 이완용과 그에 버금가는 송병준이 일제 강점기 때 경기도 일대에 보유한 것으로 확인된 땅이 지금도 95만평이나 된다는 발표를 보았습니다. 근데 시가로는 무려 수조원 대에 이른다는 그 땅은 하지만 이제라도 법을 정비해서라도 국가가 조속히 환수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혹자가 이르길 "우리나라엔 실로 이상한 현상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친일파와 그의 자손들은 부(富)와 이른바 '끗발'을 세습하면서 잘 먹고 잘 사는 반면 일제에 저항하며 목숨까지바쳤던 애국자와 그 후손들은 풍찬노숙의 빈곤함도 모자라 교육의 혜택마저 받질 못 해 그야말로 애면글면 살기에도 바쁜 지경이 바로 그것이다."하고 했는데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나라까지 팔아먹은 매국노와 그 후손들이 부와 권력을 지금껏 역시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국가적인 수치에 다름 아닙니다. 역사 바로세우기 차원과 후손들에 대한 교육적 측면에서라도 친일파는 반드시 단죄돼야 마땅한 것입니다. 만시지탄이긴 하겠지만 천하의 매국노 이완용과 송병준의 후손들이 지금도 지니고 있다는 경기도 일대의 95만평이나 된다는 딸을 조속히 환수하길 바랍니다. 그걸 처분하여 빈곤에 허덕이고 있는 애국자의 후손들에게 위로금으로 활용한다면 아마도 국민적인 찬사와 더불어 현정부의 인기도 대폭 상승하리라 사료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