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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온통 출렁이던 술멕이 날


BY 낸시 2005-01-04

마을 풍경이 지금과는 달랐다.

초가집이 없어지기 전, 마을길이 넓혀지기 전, 그 때는 모두들 참으로 가난했다.

그런데 그 때를 생각하면 온통 신나고 재미있는 일만 가득했던 것 같으니 추억이 좋긴 좋은가보다.

우리 마을은 전형적인 소작농들이 모여 만들어진 마을이라고 하였다.

팔십여호 되는 제법 큰 마을이건만 기와집 하나 없이 초가집으로만 이루어진 마을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머슴의 날이라고도 하는 칠월 백중이면 동네가 온통 잔치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 날이 더  신나고 좋은 날이었던가 보다.

뜰남이가 열심히 노래할 때였다.

어머니는 매미도 철따라 우는 소리가 다르다고 하였다.

초여름 바쁜 모내기 철은  일추게가 일을 재촉하느라, '일추게, 일추게...'이렇게 울고, 김매기 할 때가 되면, 매미가 '매암, 매암,...'하고, 늦여름이 되면 뜰남이가 '뜰남, 뜰남,...'한다 하였다.

이제 뜰하고 남이 되어 잠시 쉬어도 된다는 뜻이란다.

 

칠월 백중날을 우리 마을에서는 '술멕이 날'이라고 불렀다.

마음껏 술을 마시고 풍물을 치고 춤을 추며 노는 날이었다.

 

우리집 옆 추자나무 밑에도 평상이 놓여졌다.

여자들이 모여 노는 곳이다.

커다란 대접에 넘칠 듯 찰랑이는 막걸리가 거기 모인 모두에게 차례차례 돌아갔다.

얼른 마시고 잔을 돌려야 기다리고 있는 다음 사람이 마실 수가 있다.

할머니는 술을 잘 못 마신다.

어서 마시라는 다른 사람들의 성화에 할머니는 입에 댔던 자기술잔을 내게 내밀었다.

나는 그 때 벌써 제법 술을  마실 줄 알았다.

밥상머리에서 할아버지가 마시는 반주를 조금씩 홀짝홀짝 얻어 마시면서 술을 배웠다.

농사 짓는 집이니 술이 흔했다.

더구나 어머니는 술을 잘 빚기로 소문 난 사람이다.

술 거르는 향기에 끌려 부엌으로 가면 어머니는  바가지에 담긴 뾰얀 막걸리를 조금씩 주곤 하였다.

사양하지 않고 입맛을 다시며 마시는 어린 내가 귀여워서였을까, 어른들은 술을 마실 때 내게도 조금씩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날도 할머니가 주는 술잔을 입맛을 다시며 맛있게 비워냈다.

막내고모가 시집 가기 전이다.

술멕이 날이니 찰랑이는 막걸리 대접이 막내고모에게도 차례가 되었다.

고모도 자기 술잔을 내게 내밀었다.

다 큰 처녀가 술먹는 것이 부끄러웠는지, 아니면 정말 술을 못 마신 것인지 그것은 잘 모르겠다.

술이라면 사양할 줄 모르던 나는 그것도 받아 마셨다.

어른들의 신기해 하는 눈초리에 의기양양해져서, 놀라워하는 사람들을 곁눈으로 흘끔거리며 막걸리 한 사발을 쭉 들이켰다.

여덟이었는지 아홉이었는지 나이는 분명치 않지만 아무튼 어린 배가 불룩해지도록 막걸리를 마셨다.

남자들은 한바탕 술을 마시고 이미 풍물놀이를 시작한 듯 꽹과리 소리, 징 소리,장구 소리가 어울려 신명을 내고 있었다.

구경을 아니 갈 수가 없다.

 

앞멀 희쇠양반은 기다란 끈이 달린 모자를 쓰고 고개를 흔들면서 열심히 꽹과리를 두들기고 있었다.

징을 든 찬섭이 아버지는 점잖게 기다렸다 한번씩 '징~..., 징~...'하고 징을 울렸다.

아버지는 장구를 매었다.

장구를 치면서 한바퀴씩 춤을 추며 도는 아버지를 보는 것이 즐거웠다.

내 눈에는 우리 아버지가 제일 멋있었다.

그래서 풍물놀이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꽹과리 치는 상쇠가 아니라 장구치는 우리 아버지라고 생각했다.

노랑, 파랑 띠를 두르고 꽃이 달린 고깔 모자를 쓴 사람들이 소구를 들고 같이 어울려 춤을 추었다.

모두들 거나하게 취해서 신이 났지만 그래도 춤이라면 순님이 아버지 춤이 제일이었다.

소구가 없는  사람도 신명이 나서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며 돌았다.

새외갓집 옆에 사는 상철이 아버지는 곱사등이 춤을  추었다.

구경꾼들은 재미 있다고 허리를 움켜쥐고 웃었다.

풍물놀이 패는 고삿길을 이리저리 돌아 마을 앞 느티나무 밑에서 한바탕 신명을 냈다.

느티나무 밑의 널직한 공간도 그들이 마음껏 뛰고 놀기엔 부족하게 느껴졌는지 한바탕 신명을 내더니 그들은 갱변을 향했다.

풍물놀이 패에 뒤따르는 구경군이 없으면 신이 나지 않는다.

구경군도 기다란 꼬리를 이루어 풍물놀이 패의 뒤를 따랐다.

나도 구경꾼의 자격으로 풍물놀이 패의 일원이 되어 갱변을 향했다.

그 때였다.

땅이 나를 향해 올라오는 느낌이 들어 오른 발을 들어 살짝 그 위에 올렸다.

내 오른 발이 거기에 닿자마자 땅은 갑자기 푹 꺼져들어 갔다.

살짝 올려 딛은 내 발은 허공을 짚고 비틀했다.

이번에는 푹 꺼진 땅을 짚기 위해 왼발을 들어 멀리 뻗었다.

그 순간 땅이 푹! 솟아 올랐다.

멀리 뻗으려던 왼발이 솟아오른 땅에 턱! 걸려 비틀했다.

내가 한걸음 한걸음 띨 때마다 땅이 솟았다, 꺼졌다, 출렁출렁 요동을 쳤다.

땅의 흔들림 따라 나도 넘어질 듯, 말 듯, 비틀비틀하였다.

풍물소리가 뚱땅뚱땅 요란스레 장단을 맞추었다.

내 유년의 아름다웠던 그 날이 좀 더 선명하길 바라는데 흐릿하기만 하다.

아마도 그 날 내가 너무 취했던 모양이다.

지금도 내 귓가에 풍물치는 소리가 아련히 들리는 듯하다.

아직도 취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