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차 시간에 맞추어 올라탄 시내 버스는
어쩌면 그렇게 딱, 나 하나만을 세워놓고 달리는지.
중간쯤에 세워진 쇠기둥을 두손으로 붙들고 밖을 내다보니
깜깜한 거울속에 처량한 얼굴의 젊은 여자가 애원을 하고 있다.
좌석에 앉은 사람들의 얼굴을 차례로 훑으니
모두다 내 모습과는 다르게 별 일 없이 편안해 보인다.
별 일 없는 그 사람들이 다 행복해 보인다.
나도 이 일만 아니었으면 저 사람들처럼 편안할 것만 같아
말 없이 자리에 앉아있는 그 사람들이 한없이 부럽다.
큰놈이 유아원엘 잘 다녀 왔을까?
작은놈은 우유를 잘 먹고 놀았을까?
혹여 두놈이 어른들 애를 태우진 않았을까?
두달이 다 되도록 합의를 해 줄 기색을 보이지 않는
할머니네 가족들이 이럴땐 너무 원망 스럽다.
년말까진 합의를 해 줄줄 알았는데....
새해를 편안한 마음으로 맞게 해 줄줄 알았는데....
눈덩이처럼 부풀던 원망이 끝내 내 볼위로 눈물을 흐르게 했다.
팔십이 다 되신 할머니가
손주를 데리고 길을 건너시다가
조르르 먼저 길을 건너버린 손주를 못 쫓아가시더니
갈팡질팡 하시다가 결국은 남편이 탄 오토바이 빽미러에
걸리셔서 주저 앉으셨는데 척추까지 내려 앉아 버린것이었다.
"내가 잘못한겨. 젊은인 잘못 없어. 내가 갈까 말까 하는통에 옷에 걸린겨.
젊은이가 착혀서 그냥 안 간게 잘못이여~~!"
처음에 병원에서 할머니는 자식들에게 그렇게 말씀 하셨었다.
하지만 하나둘씩 여덟이나 되는 자식들이 다녀가더니
할머니는 입을 봉해 버리시고 아무 말씀을 안하셨다.
아니 못하시는것 같았다.
그런식으로 말하면 불리하다는 언질을 받으셨던 모양이었다.
그많은 자식들이 있어도 모두들 바쁘니
할머니를 겨우 모시고 있는 막내 아들도 차라리 병원에 계시는게
자식들을 돕는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았다.
그러니 누가 선뜻 나서서 합의를 할 생각을 안 하는것이다.
매일 남편이랑 내가 번갈아 들러서 간병인 노릇을 하며 할머니를 수발했다.
죽도 쒀가고 곰국도 끓여가고.....
연년생 아들 둘을 시부모님께 맡기며 얼마나 간병을 열심히 했는지
할머니는 살이 찌셔서 몰라볼 만큼 건강해 지셨는데도
자식들은 도대체 합의를 해 줄 생각을 안 하는것이다.
병원비는 중간중간 계산을 해야하고,
이십오년전쯤이니 오토바이에 보험을 들지도 않았을때라
입원비에 영양제를 놓아 드려야 한다는 자식들 언질까지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하루 하루 경비가 힘에 겨웠다.
결국은 돈때문에 남편이랑 티격티격까지 하는일이 생겼다.
어른들은 도무지 불구경 하는 식이고
시집온지 얼마 되지 않은 며느리인 나는
어른들께 돈 얘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시부모까지 미워졌다.
외아들이면서 어떻게 이웃 불구경 하듯 할 수 있나 싶어서 였다.
그렇다고 남편을 감옥에 가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무슨 돈이라도 구해서 합의를 해야 했다.
그때를 맞춰 친정 엄마가 5년 동안 부어 오신 쌀계를 탄다는 소식을 들었다.
절대로 친정엔 손을 버리지 않으리라던 내마음의 맹세를 져 버리고
엄마의 쌀오십가마를 돈으로 바꿔 왔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합의를 보는일에 나섰다.
자식들의 모습을 두달여동안이나 지켜보던 할머니 사위가
안되겠다 싶었는지 자식들을 설득해가며 다행이도 합의에 나서 주었다.
해를 걸쳐놓고 두달여동안 내 피를 말리던 일을 마무리 해 주었던
그 할머니의 사위분에게 고마운 마음은 지금도 내 가슴에 자리하고 있다.
별 일 없이 산다는것~!
그냥 무덤덤한 하루를 지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한 것이라는 걸 나는 절실히 체험했다.
조금만 더 길었으면 내 가정에 무슨 일이 일어 났을 것이며
크게는 또 내 인생이 어떻게 바뀌었을런지~!
살면서 어려움이 있을때마다 나는 그때 그시간을 기억해 낸다.
그 절실했던 부러움이,
아무 일 없이 그냥 버스를 탈 수 있는 일 이었다는 것을 기억해내면서
아주 평범함이 행복이라는 걸 새긴다.
남편 역시도 그렇다.
가끔씩 지난얘기가 자연스럽게 실타래를 푸는 둘만의 시간이면
빠지지 않고 그때 그 년말 년시 얘기를 꺼낸다.
그때 그일이 우리에게 불행의 시간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가 살아온 그 시간뒤의 삶에서는
그렇게 불행으로만 생각했던 그 순간들이
아주 큰 힘이 되어 주기도 했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