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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대여점


BY 개망초꽃 2004-12-14

 책 대여점으로 가는 길에 키 작은 해바라기는 해마다 모여 꽃을 피웠다.
키가 자라지 못한 건 영양상태가 좋지 못해서 그랬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후문엔 지붕이 낮은 상가가 있었다.
상가라 하기엔 부족한 지하도 없고 2층도 없는 단층인 작고 아담한 가게 터였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와 다른 아파트 단지로 가는 약간 비탈진 길과
그 길과 이어진 잔디가 넓은 뜰,그래서 아이들과 산책을 하는 길이기도 한,
이른 봄엔 가느다란 산수유나무가 부채살처럼 꽃을 피웠다.
길과 뜰 사이에 돌이 놓여 있는데, 돌 틈으로 봄 풀꽃이 여리게 피어났었다.
아이들은 돌을 냇가에 만들어진 징검다리를 건너듯 디디면서 풀꽃을 보고
풀꽃 이름을 내게 묻곤 했었다.
징검다리가 끝나면 오른쪽으로 길이 꺽어 지는데 그 길을 따라가면 작은 수퍼가 나오고
수퍼 옆에 작은 비디오 가게가 있고, 그 옆에 더 작은 책대여점이
내가 이 신도시로 이사 올 때쯤부터 장사를 시작했을 것이다.
이 곳으로 이사 오면서 살고 있는 아파트는 내가 첫 주인이었다.
십년동안 나로선 주인 노릇을 철저히 했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만 아파트 입장에서 보면
내가 무지하게 깐깐해 보였을 것이고 숨이 막혔을 것 같다.
물건 하나도 흐트러지는 걸 견디지 못했고 집밖에 나가는 일은 수퍼 가는 일과
책 빌리러 가는 일 외엔 네모난 공간에서 네모난 거실에 앉아 네모난 창으로
네모난 하늘을 보며 네모난 생각 틀에 놓여 있었으니 그걸 지켜 봐야하는 아파트는
숨이 찰 정도로 답답했을 것이다.


여름엔 책 대여점 맞은편에 자작나무가 여러 그루 있는데 그 사이로 비가 내렸다.
그럼 조금은 슬픈 수필집을 빌렸다.
큰 아이가 중학생이 되고 처음 아프트로 이사 올 때 태어난 지 한달된 둘째가
유치원에 들어가면서 부터 난 책 대여점을 자주 들락거렸다.
아파트 정문 쪽엔 제법 큰 상가가 있고 그 상가 지하에도 책 대여점이 있는데
내가 유독 후문 대여점을 이용 하는 것은 오로지 한 가지 푸른 뜰 때문이었다.
그 가게터 앞으론 잔디가 깔려 있고 등나무아래 나무의자가 한가롭다.
책을 빌리러 가거나 갔다 주고 오면서 가끔씩 커피 우유를 사가지고 나무의자에 앉아서
영양상태가 안 좋은 해바라기를 보고 산수유나무를 보고 저 멀리, 그 쪽 땅도 문제가 있는지,
갸날픈 자작나무를 보았다. 뜰은 별 게 없었다. 몇  그루 산수유나무와
의자위엔 말라죽은 등나무 줄기만 있고 꽃이라고 해봤자 해바라기와 보일듯 말듯 보이지않는 풀꽃이 전부인 삭막하고 건조한 풍경이었다.

내가 책 대여점 주인이라면 빈 뜰에 꽃을 심어야겠다.
산수유나무 밑 둥에 도라지꽃을 동그랗게 심었을까?
그것보다 우선은 해바라기 밑 둥에 거름흙을 덮어줘야겠다.
키 작은 해바라기를 보면 또래 아이보다 키 작은 딸을 닮아 마음이 쓰였다.
큰 아이는 항상 키가 작았다. 딸아이의 책상은 앞줄이었고,
운동장 조회시간에도 맨 앞에 아니면 세 번째를 벗어나질 못했다.
딸아이가 안 크고 싶어서 그랬겠냐마는, 딸아이의 약점은 항상 키였다.
물론 유전적인 요소도 있었지만 태어날 때부터 허약하게 태어난 딸아이는
먹는 걸 무지 지겨워했다. 그래서 딸아인 영양부족으로 키가 잘 자라질 않았다.
키가 잘 자라지 않는 딸아이였지만 책은 좋아해서 난 항상 딸아이와 책을 빌리러
키 작은 해바라기를 보며 대여점을 갔다.
둘째는 어려서 빌리는 책이 마땅하지 않았지만 밖에 나오면 무족 건 좋아할 나이였고,
누나랑 같이 풀꽃도 보고, 운 좋으면 군것질거리를 입에 넣은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도 해서
어느 날은 세발자전거를 끌고 어느 날은 장난감 차를 손에 쥐고 앞장서서 달려가곤 했었다.

내가 엄마네로 이사할 때까지 책 대여점엔 주인이 세 번이나 바뀌었다.
세 주인 다 사적인 이야기를 해 본적은 없지만 장사가 잘 안되어서 바뀐 게 아닐까 생각하며
책을 빌리고 노란 얼굴 해바라기 앞에 잠시 멈추었다가 가을이구나
또 한해가 접어드는구나 하면서 집으로 곧장 들어와 빌려온 책을 새벽까지 읽어내곤 했다.

십년동안 한 마을에 살면서 한 곳 책대여점을 다녔지만, 뒤에 온 시간은 자취를 감추고
새로운 시간은 다른 길을 내 주고 있었다. 이 곳을 떠나야함을 알았을 때는 책을 볼
정신적인 여유 한 치의 틈도 없었다. 여름이 지고 가을이 접어들 때 난 그 곳
그 아파트 그 대여점 그 뜰을 떠났다. 사람 사이에 떠나야 할 땐 두 번의 안녕도
거추장스럽고 지겹듯이 떠나야 함을 미리 알고 있었을 때는 아파트는 낡아져
미련 조차 보이질 않았다. 책 대여점의 뜰도 가을이 오고, 해바라기는 꽃을 피워 내려고
온 기운을 위로만 위로만 토악질하고 있었을텐데...

엄마네로 이삿짐을 풀고 한동안은 책 대여점을 찾지 않았다.
장사를 시작하고 어느 정도 장사라는 것이 이러하구나를 알 때쯤 책 대여점을 찾았다.
엄마네 마을 책 대여점을 가려면 벚나무 그늘이 많다.
봄밤에 그 밑을 지나면 흰눈이 하늘거리는 겨울 같고,
여름에 그 그늘 밑을 가면 촉촉한 싱그러움이 좋다.
가을 달빛아래 붉은 낙엽이 꽃등처럼 피어나고,
늦가을 벚 나뭇잎이 빗물에 젖어 낙인처럼 찍혀 있는 길을 걸으며
내 자신이 벚나무를 닮아있다는 생각에 허무했다.
새로 찾아 온 이 길, 벚나무 그늘을 지나면 대여점 다 와서 폭 50센티 정도의 화단이 있다.
화단엔 여름이 다 가도록 별다른 화초가 자라지도 않고 꽃을 피우지도 못했다.
난 옛 대여점을 오가며 생각하던 것을 다시 생각하게 했다.
내가 책 대여점을 한다면 저 화단에 사시사철 가지각색으로 피는 꽃을 심을텐데....
돈 벌고 먹고 사는데 아무 도움도 되지 않고 책방 주인과 아무런 의견도 나누지 않고 난 혼자서
저 영양가 없는 뜰에, 이 보잘 것 없는 화단에 꽃을 심고 꽃을 피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오래된 뜰은 아무런 불만이 없었고,
새로 만난 화단도 꽃 키우는데 관심도 없는 것 같은데 말이다.

새로 사귄 책 대여점은 비디오 가게를 겸한 양다리 책방이다.
주인은 누구인지 모르겠고 대부분의 시간을 아르바이트생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요즘도 내년에 대학생이 되는 딸아이와 이제 만화책을 보기 시작하는 아들아이와 셋이서
책 대여점을 간다. 가서 비디오도 고르고 세 사람의 성격과 나이와 맞추려면 고르는데 제한이
많이 따라서 자주 비디오를 빌리지 않고, 서로 보고 싶은 책을 고를 때가 많다.
지난 토요일 밤에도 “양다리” 비디오 책 대여점을 갔었다. 비디오 하나를 고르고
각자 책을 골랐다. 딸아이는 무슨 만화더라? 자기는 시시한 만화는 안본다고 하던데......
아들아이는 유명한 만화던데? 제목을 잊어버렸다....
나는 소설책을 골랐다. 셋이서 양상추 듬뿍 얹은 샌드위치를 먹으며 비디오를 보고
각자 편한 자리에서 편한 자세로 책을 보았다. 제일 먼저 아들아이가 잠이 들고,
그 다음에 딸아이가 내일 아르바이트 해야 한다며 이불 뒤집어 쓰고 자고,
난 새벽 4시까지 소설에 빠져 들었다.

그 옛날 그 책 대여점은 본래 모습 그대로 뜰 안에 해바라기를 키웠을까?
키 작은 딸아이는 여전히 키가 작고, 아들아이는 얌전한 아이 그대로이고,
뒤에 걸어 온 시간은 감추며 걸어가고 싶은데......
그러나, 새로운 시간은 내가 가고 싶은 길로 길을 내주지 않아 굽이굽이 찾아가는 이 길...
책 대여점으로 가는 길처럼 편하고 푸르고 꽃을 심고 싶은 욕심없는 마음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