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불었다. 숭숭한 은행나무 틈새로 바람이 불었다.
첫눈이 내렸다. 건널목에 서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데 눈이 내렸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창밖은 눈이 내려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설레이고 있는데 가슴은 비어 허공에 떠 있다. 걸레질을 하다 문득 이러려고 결혼을 했나? 걸레를 화장실 구석에다 집어 던지고 침대에 엎드려 울었던 적이 있었다. 첫눈을 보면서 사는 게 재미없구나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가 늘어지게 잠이나 실컷 자고 싶었다.
나이가 쌓아질수록 첫눈이 오는데도 감정이 일렁이질 않았다. 벽돌을 한 장 한 장 올리면 벽이 되고 방이 생기고 집이 완성 되어 가는데, 나이라는 것은 더해질수록 감정은 곱하기기가 되어 곱절로 잘려나가게 된다.
그래도 첫눈내리는 독특한 날, 옛일을 뒤적거려서 중요한 약속이 있다던가 눈물나도록 슬픔이 있었던가 아무리 기억해 내려 해도 없었다. 젊었을 때 친구들과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호들갑스럽게 약속은 해 놨지만 첫눈이 오는 날이면 사는 곳이 달라 언제가 첫눈이었는지 조차 흐지부지 해져서 넘어가 버렸고,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도 멀고도 먼 땅 끝 마을에 살고 있어서 서울도 눈이 내릴까요? 저는 지금 창밖을 보며 님을 생각하고 있지요 하는 편지만 왔었다. 첫눈다운 첫눈이 내렸을 때 남편은 아이들을 데리고 나오라고 했는데 애기가 자는 시간이라며 낭만이고 뭣이고 귀찮다고 눈길을 걸어본 적도 없었다. 첫눈이 내리면 첫사랑에게서 그대가 보고 싶다는 문자가 왔을 때는 우린 너무 멀리 와 있었고, 시간이 엇갈려 있었기에 만날 수가 없었다.
버스에서 내려 매장으로 가려면 조금 걸어야한다. 눈은 그쳐 있었다. 싱거운 첫눈이었다. 매장에 들어와 점심을 먹을 때도 눈은 더 이상 내리지 않았고 버릇이 되어 커피를 마실 때는 햇살이 도로든 인도든 짱짱하게 진을 치고 점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또 눈이 내렸다. 넓은 창안을 지나 내 동공으로 눈은 내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생각나는 추억이 하나 나의 빈 가슴을 채우고 있었다.
그때가 아마도 초등학교 4학년이었나? 확실하진 않지만 5학년이었을 것이다.
홀로된 엄마는 외갓집에 나와 바로 밑에 동생을 맡기고 서울로 돈을 벌려 떠나가셨다.
외갓집에 일 년 정도 맡기셨다가 2학년 때 동두천에 살고 계신 작은아버지 댁으로 나만 전학을 시켰고 일년 정도 동두천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또 강원도 외갓집으로 전학을 했다.
그리고 또 일년 정도 지나서 고향친구들과 익숙해지려 할 때쯤 작은아버지 댁으로 나를 보내야만 했다. 그 해 작은아버진 동두천에 사시다가 교통사고를 당하셔서 빈털터리인 세간살이를 짊어지고 불구가 된 다리를 끌고 서울 성북동으로 옮기셨는데 엄마는 그곳에 나를 또 무작정 전학을 시켰다. 난 엄마에게 외갓집에서 살고 싶다고 엄마랑 같이 살면 안 되냐고 작은집엔 절대 안가겠다며 외갓집 문고리라도 잡고 버티고 싶었지만 싫다는 말 한마디도 안했다. 자식을 보내야하는 엄마가 나보다 더 힘들테니까. 혼자되신 엄마에게 짐이 되기 싫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난 작은집으로 가서 사는 것이 그때 당시엔 제일 끔찍한 일이었다. 엄마가 없어도 아버지 산소가 고갯마루에서 뻔히 보여도 감자 넣은 보리밥만 고추장에 비벼 먹어도 겨울엔 손등이 쓰리도록 터져도 내 고향이면서 엄마의 고향인 외갓집에서 오래도록 살고 싶었다. 가난에 쪄든 외갓집 봉당에서 놋숟가락으로 자주 감자껍질을 저녁마다 벗겨내도 난 나무 타는 매캐캐한 냄새가 좋았다. 눈을 뜨면 보이는 녹색의 소소한 향기가 좋았다. 아버지 일찍 잃은 내가 불쌍하다고 일도 잘 안 시키시고 야단도 별로 치지도 않던 외갓집 식구들이 좋았다.
2학년 무렵 처음으로 동두천 작은아버지에 갔을때 그 때 작은어머니를 처음 봤었다. 입술이 얇고 키가 작은 작은어머니는 처음부터 나를 벌레 보듯 싫어 하셨다. 설거지를 깨끗이 못한다고 구박하셨고, 몸에 때가 있다고 때리셨고, 머리꼬랑지에 제비꼬리를 달았다고 흉을 보셨고, 팔다리가 길다고 미워하셨다. 내 자식 하나도 키우기 힘든데 돈 없는 큰집 자식인데 불쌍한 생각이 들기는커녕 귀찮고 아깝기만 했을 것이다.
새로 터전을 잡은 작은 아버지 집 마당은 풀 한포기 없는 시멘트로 바른 성북동 산꼭대기 집이었다. 방 한 칸에 부엌 하나에 교통사고로 불구가 되셔서 인생을 포기 한 듯한 무기력한 작은아버지와 얇은 입술로 나를 악담하고 자그마한 손으로 때릴 땐 가시박힌 아카시아나무가 되는 작은어머니가 가슴 떨리도록 무서웠다. 거기다가 나보다 한 살이 어린 남동생은 자기 엄마와 한 구덩이 속이 되어서 나를 구박하는데, 도망가고 싶은 적이 여러번 있었다. 그러나 도망을 어떻게 하는지도 어디로 가야할지도 몰라서 하루를 살고 한달을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때 내게 유일한 위안을 주고 도망칠 둥지가 한군데 있었는데 보배라는 친구였고 그 친구네 집이었다. 친구는 이름처럼 그 집에 보배였었다. 막내딸이고 사는 것도 괜찮아서 그 집에 가면 보배 방이 따로 있었다. 보배 집에 처음 가던 날은 마당에 함박꽃이 환하게 피던 햇볕 졸고있던 봄이였다. 친구 집 뒤로는 수양버드나무와 고향 산에서 흔히 보던 떡갈나무 언덕이 있었다. 그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멀리 산도 보였다, 난 그 산 너머 고향을 그리며 힘든 하루를 살아낼 수 있었다.
엄마는 풀한포기 나지 않는 작은집 마당에 살모사 눈닮은 작은어머니 밑에 나를 놔 두고 일학기가 다 끝나도록 찾아오지 않았다. 8살인 날 외갓집에 두고 서울로 떠났을 때도 엄마를 원망해 본 적이 없었고, 다 커서 성인이 되어서도 엄마를 원망해 본 적이 없었는데, 작은 집에 두고 한번도 찾아 온 적이 없는 내가 5학년이었을 때 그 때 그 엄마를 많이 원망했었다. 작은 어머니의 구박이 심한 날 밤이면 옆으로 누워 숨죽여 울면서 내겐 엄마가 없다고 엄마가 있다면 날 이렇게 놔 둘 수가 있냐고......고향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내일 도망쳐야지 했었다. 그러다가 학교에 가면 보배가 있어서 엄마에 대한 원망이 수구러들고 도망쳐야 겠다는 마음이 없어지곤 했었다.
그 해 겨울 엄마보다도 좋았던 보배랑 싸우게 되었다 의지할 곳은 보배밖에 없던 나는 며칠동안 사는 것이 허공속에 떠 있는 먼지 같았다. 보고 싶은 것이 없었고, 듣고 싶은 것도 없었고, 먹고 싶은 것도 생각이 안났다. 그날도 힘없이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첫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선생님이 첫눈 오는 날이라고 공부하던 걸 멈추시고 운동장으로 나가서 눈과 함께 놀라고 하셨다. 아이들은 신이 났지만 난 신이 나지 않았다. 운동장엔 갑자기 내린 첫눈이 고향 마당에 쌓인 눈처럼 소담하게 모여 들고 있었다. 난 친구들과 놀지도 않고 눈을 하염없이 맞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 어깨를 털어주었다. 보배였다. 우린 서로 웃으며 눈을 털어주고 눈 오는 하늘을 같이 쳐다보았다. 눈은 내 얼굴에 차갑게 내렸지만 그건 절대 차가운 눈이 아닌 포근한 눈이 되어 있었다. 보였다 쌀가루 같은 눈이, 들렸다 아이들의 신나 떠드는 소리가, 혀를 내밀어 고향에서 하던 대로 낼름 눈을 받아먹었다. 맛은 없었겠지만 먹고 싶었다.
선생님은 그날 첫눈이라고 제목으로 글짓기를 한다고 하셨다.
엄마가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고향으로 낙향을 하신 건 내가 8살, 그러니까 초등학교 일 학년 때였다. 그 해 여름 아버진 세상 사람이 아닌 하늘의 사람이 되셨다. 그것이 내가 여름방학을 하고 며칠 뒤였다. 우등상을 받은 내 상장을 보시고 좋아 하셨다고 엄마가 두고두고 꺼내서 얘기해 주시던 전설 같은 이야기이지만, 난 엄마와 같이 살 땐 공부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리고 뭐든 반에서 제일 잘 했다고 한다. 내 기억으로도 고향에서 있었을 땐 뭐든 자신감이 있었는데, 작은 아버지 집에서 살 땐 국어 책도 읽지 못했고, 그림도 그리지 못했고, 일년 사이 뭐든 못하는 아이가 되어버렸다. 잘하는 게 아무것도 없었고 떨리고 무섭고 주눅이 들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멍청이가 되어있었다.
첫눈이라는 제목을 적고서 글을 썼다. 쉽게 원고지 몇 장을 채울 수가 있었다. 보배이야기를 썼다. 보배와의 싸웠을 때의 감정과 첫눈이 와서 다시 화해를 하고 같은 눈을 맞고 같은 눈을 먹었다는 이야기를 썼다. 난 손을 들고 발표할 용기도 없어졌었다. 국어책도 떨려서 더듬거렸던 내가 내 글을 발표할 용기가 날 리가 없었다. 선생님이 나를 지적하셨다. 이런일도 처음이었다. 산골에서 올라오고 거기다가 공부도 못하고 옷도 허술한 내게 관심이 전혀 없었던 선생님이셨기에 난 고요속에서 생각지도 않은 폭죽이라도 터진 것처럼 네? 하고 놀라고 있었다. 그래 너? 일어나 읽어 봐라...난 엉거주춤이었던가? 아님 내가 하는 행동도 존재도 없이 벌떡 일어났던가? 암튼 일어나 떠듬거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내가 내 글을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