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해서 돌아와 아이들과 장난치며 웃는 여편에게 남편이 이렇게 말했다.
"남편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지도 모르고 여자가 철딱서니 없이 아이들하고 낄낄거리기나 하고..."
여편은 찔끔했다.
요즘 남편에게 여편이 모르는 심각한 고민거리가 생긴 모양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왜? 무슨 일이 있어?"
"대통령이 바뀌면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도 모르는데..."
"뭐, 당신같은 말단까지 영향이 미치겠어?"
"제발 뭘 모르는 소리 좀 하지마. 집구석에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줄도 모르고..."
어디서 많이 들은 소리다.
시아버지가 툭하면 시어머니를 무시하며 하던 말이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더니 남편의 입에서 시아버지가 평소 시어머니에게 하던 말을 듣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자기도 모르게 뇌리에 그런 말들이 입력이 되는 모양이다.
여편은 남편의 직장 동료 부인들이 만난 모임에서 물었다.
"댁에서들도 요즘 선거 걱정해요?"
"네? 무슨 말씀이세요? 아무런 말도 없던데..."
"뭐, 우리 같은 사람들까지 영향이 미치겠어요?"
"아무 말 없던데요..."
여편은 자기 생각이 옳음을 확인하고 남편이 괜히 폼 잡는 것임을 알았다.
시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뭐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줄 안다.
평생 말단 공무원이셨던 당신의 눈에는 서기관이니, 이사관이니 하는 것들이 대단하게 보였는지도 모른다.
그런 대단한 아들이 좀더 무게를 잡고 위엄을 갖추어 살았으면 하는데 아마 시아버지의 눈에 그리 보이지 않은 모양이다.
잠옷 바람에 고무신 질질 끌고 화장실에 다녀오는 아들을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 보았다.
고무줄이 헐렁한 잠옷 바지춤을 움켜 잡고 추위에 떨면서 방정스레 팔딱거리고 뛰는 아들의 꼬락서니가 아무래도 아들의 지위와 격이 맞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시아버지는 화장실에 다녀오는 아들에게 꾸짖는 듯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야, 너도 이제 지위가 지위인 만큼 걸음걸이도 그에 맞추어 젊잖게 걷도록 해라.
어깨에 힘을 주고, 등은 꼿꼿이 세우고,고개는 사십오도쯤 위로 올리고, 보폭은..."
이 말을 들던 시어머니가 시아버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마디 거들었다.
"아니, 화장실 다녀오는 사람이 어깨에 힘을 주고 등은 꼿꼿이 세우고 머리는 위를 치켜보고 그리 걸으면 꼴 좋겄소. 정말 소가 웃을 노릇이네..."
시어머니는 평소 무게잡기 좋아하는 시아버지에게 당한 불만을 이렇게 풀어내었다.
이런 때 시어머니는 정말 멋쟁이다.
마루에 서서 이 말을 듣던 며느리도 드디어 참지 못하고 킥킥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시아버지가 그렇게 말할 때 며느리는 남편이 자기에게 쏟아놓던 말들이 기억 나서 속이 편안치 않았었는데...
시어머니의 말에 평소 무게잡기 좋아하는 남편으로 인해 쌓인 불만이 다 날아간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