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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 빠른 집장만, 빠른 깨달음


BY 꿈 2004-10-31

87년 늦가을,
결혼식은 올렸지만
신혼집이 없었습니다.
결혼 날자를 잡으면서 신랑이
전세 얻을돈 3백만원으로 아파트를 분양받아
방 얻을 돈이 없었어요.

방도 없으면서 뭣때문에 결혼식을 서둘러 올렸냐면

아무래도 신랑혼자 직장을 다녀서는 집장만하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릴듯 해서

이리저리 계산끝에 둘이 벌어 얼른 내집 장만부터 하기로 했던것입니다.
신랑은 부산 호텔에서
저는 서울에서 일하며
둘이 받는 월급과 보너스를 고스란히 보태면
석달간격으로 내야하는 아파트 중도금을 해결할 수 있었거든요.
신랑은 부산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고
저는 좁디  좁은 친정집에서 결혼전 처럼 많은 동생들과 한방에서
살아야 했지요.

결혼을 한다면서 신혼살림살이를 하나도 준비않는것이
섭섭하기도 하고 결혼하는 기분도 좀 내고 싶어서
시댁예단 하는김에 이불 몇채를 샀더니만
이 펴보지도 못한 신혼 이불 보따리가 방두칸짜리 친정집 방구석에서
온갖 눈총을 다받았지 뭡니까. 일년동안이나. 
저도 물론 이 이불보따리에 기대고 앉아 가시방석 친정살이
일년을 꿋꿋하게 견뎌내었고요.

친정식구들에게 참 미안한 일이었어요.

어쩌다 친척이라도 오는날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니? 얘가 저번에 결혼한 애 아냐?
아이구 얘가 왜 여기와 있어?"

하고는 깜짝  놀라서 묻곤 하더군요.
친정엄마는 계면쩍은 표정으로

"얘네들이 집을 사느라고.
맞벌이를 하잖어.
남편이 부산에 있으니
방을 따로 얻어놓기도 그래서
당분간 이렇게 있는거여."
하며 구구하게 설명을 늘어 놓곤 했습니다.

 

새신부 신세가 하도 처량맞아
시댁에 방한칸을 비워달래서 신혼방을 꾸며놓고
거기서 직장을 다니고 싶은 생각도 간절했지만
시부모님과 같이 살던 손위 동서가 난색을 하며
반대하더군요.

 

한달에 한번씩 남편이 서울로 올라오거나
제가 부산으로 내려가곤 했는데
부산역에다
서울역에다
눈물께나 뿌려대며  신혼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때는 남편에게 날마다 일기 쓰듯 편지를 써 보내며
서로 안타깝게 그리워 했었지요.

토요일 오후에 부산으로 내려갔다가
일요일 밤 11시쯤 기차를 타고
새벽녘에 서울에 도착해서 출근하곤 했습니다.

"세월아! 빨리 흘러가라,빨리 흘러라."
날마다 노래를 불렀어요.

그때 부산에 가면
떨어져 사는 신혼부부가 안쓰럽다시며
호텔비를 내주셨던 분들 많았는데.
지금은 이 풍진 세상에 어디서 무얼 하며 사시는지 .

신혼부부가
무엇때문에 그렇게 집부터 마련하느라
서로 애를 태우며 멀리 떨어져 사느냐,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일생을 살아가는데 추억이 되는 살뜰한 정이
신혼생활동안 쌓이는것인데
왠 미련한 짓이냐,
염려해주시던 회사 선배님들은 또 어디서 어떻게
이 가을을 보내시는지...
참 궁금해 지는군요. 옛얘기를 늘어놓다 보니 말입니다.

 

남편이 올라오거나 제가 내려가지 않는 토요일 저녁에는
저도모르게 자꾸만 눈물이 글썽거려지는데
그 모습을 친정 식구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슬그머니 집을 나와 어둑어둑해지는 동네를 몇바퀴씩 돌아
마음이 진정된 다음 집으로 돌아가 잠을 청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남편하고 같이 살기만하면
세상 다 얻은것처럼 행복할거라고
한집에 살날만  기다리고 기다린끝에
드디어 아파트 부금을 다 내고 입주하면서 제가 직장을 그만두고
부산으로 내려가 살림을 합치게 됐습니다.

 

서로 얼굴만 마주보고 있어도 행복이 저절로 뭉게뭉게 피어 오를것 같았던 남편과 저는
정작 매일 같이 지내다보니 서로 다투는 일이 저절로 생기더군요.

원래 강하고 분명한 성격의 남편과
고분고분한것 같지만 한번 울둑밸이 솟으면
쉽게 가라앉히지 못하는 제게
하루는 결정적으로 서열이 메겨지는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시동생 문제 때문이었는데
제가 성격을 숙여 남편밑으로 들어가지 않고
해볼테면 해보자는 식으로 며칠을 버티고 나니
삼일째 되던날 아침에 남편이 일어나는데
주루룩 코피를 흘리는거였습니다.

 

코피!
피를 보고나니 깨달음이 오더군요.

아! 저 사람이 내 남편인데.
평생 서로 같이 의지하며 살아갈 내남편인데
내가 잘났다고,
내가 옳다고, 끝까지 버텨봐야
힘드는 사람은 결국 내 남편이구나!
어차피 이혼할것도 아닌담에야
저사람 1등시켜주고
나는 2등해야겠다는 생각이 스르륵 들더군요.

 

그래서 이날이때까지 봐주고 이해해주고
받아주면서 살고있습니다.
처음엔 남편이 자기가 힘세고 똑똑해서 마누라한테 대접받으면서
사는줄 알고 매일 큰소리를 뻥뻥치더니
이제 십칠팔년 세월이 흐르고 나니
알아서 2등하는 마누라를 남편은 고맙게 생각하는군요. 

집장만하느라 신혼을 떨어져 보내며 고생을 빨리 하고보니

여유로운 생활도 빨리 찾을 수 있었고

신혼생활에서 빨리 깨달음을 얻고보니

고맙고 좋은 마누라도 빨리 될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