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더딘 걸음으로
지난 달, 모 시청에서 청소부를 뽑는데 대학 졸업자가 너무나 많이 응시해서
면접관이 곤혹스러웠다는 뉴스를 접하고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다. 모 시청에서는 약간 명의 공무원을 모집하기 위해 시험을 치뤘는데
만점이 무려 50여 명이 나왔다는 뉴스도 있었고 모 중견기업의 신입사원 공채에는
합격율이 무려 600대 1이라는 소식도 있었다.
이런 현상을 보면 약자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벅차고 힘겹다.
태초부터 인간의 삶은 치열한 경쟁의 역사였다.
따라서 경쟁에서 일등을 한 사람은 명예와 권력을 성취할 수 있었지만 꼴찌는 치욕과
좌절을 피할 수가 없었다.
인간들은 일등이라는 명예가 얼마나 큰 물질만능 사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일찌기
짐작을 못했다.
그져 모든 경쟁에서 일등만이 살아 남는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일등을 하지 못하는
이들은 실패한 인생으로 치부하기 일쑤였다.
올림픽 경기에서도 금메달 이외에는 이제 아무 의미가 없는 듯 하다.
최선을 다했지만 금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는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흘려도 환영도
격려도 받을 수도 없다
하지만 경기에 나가기 전에는 그들을 우리는 태극전사라고 불렀다.
마치 적을 죽이고 내가 살아야하는 전장터에 나아가 싸우는 병사처럼 취급하였기에.
모 중견작가의 에세이 중에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라는 글이 있다.
작가는 마라톤 우승자를 보러 갔다가 선두그룹은 이미 지나 간 뒤라 후미그룹의
선수들만 볼 수 있었단다.
선수들은 한결같이 고통스러운 표정이었는데 그 모습들은 너무나 정직하고 아름다웠으며
난생처음 접한 것이라 고백하였다.
선두그룹보다 한참이나 뒤져 심리적으로, 체력적으로 더 힘들고 고통스러웠음에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골인점을 향해 뛰는 모습이 너무나 감동스러워 선두그룹에게
보내는 박수보다 더 큰 박수를 보냈다는 것이다.
우리는 꼴찌에게 더 큰 박수와 격려를 보내야 하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인생은 영화나 소설같은 픽션이 아닌 실재 상황이기 때문이다.
일면식이 있었는 작가의 글을 빌리자면 픽션은 황금이요, 현실은 똥이라는 문장이 있다.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면 성공할 것이고 일등도 할 것이다. 늘 접하는 말이지만 어찌
생각하면 픽션같이 느껴진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최선을 다해도 사람에 따라 성취할 수 없는 것이있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빙산의 일각처럼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는 부분이 무한히 존재하듯이
타고 난 능력에 따라 아니면 살아가는 환경에 따라 알파라는 변수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때로는 꼴찌의 모든 노력이 엉뚱한 사람의 배를 불리는 경우도 생긴다.
먼저 골인했다고 교만해서도 꼴찌했다고 좌절해서도 안되며 횡재를 했다고 사치하며
과거를 망각해서도 안된다.
꼴찌에게도 박수와 격려를 보내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비록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에서는 졌지만 자신과의 경쟁에서는 승리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승자도 패자도 최선을 다했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세상에는 무한한 것보다 유한한 것이 많듯이 영원한 일등도 영원한 꼴등도 없다.
결과보다도 무엇을 위해 노력했던 과정이 더 소중하기 때문에 일등은 일등대로 꼴등은
꼴등대로 가치가 있게 마련이다.
우리 대한민국 선수가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따고서 손을 들었을 때 손바닥에 묻어 있는
선명한 핏자국을 보면서 가슴이 뭉쿨하여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었다.
손바닥이 찢어지도록 최선을 다한 선수에게 은메달은 금메달보다 더 고귀하고 값진
것이었던 것이다.
각자의 인생에는 주어진 섭리(攝理)가 있다.
인생을 아는 어르신들은 부자들을 보면서 이런 말을 하십니다.
"저 사람은 하늘이 내린 부자야!"
맞습니다. 큰 부자는 오직 하느님의 소관입니다.
작은 부는 근면하고 노력하면 이룰 수 있지만 큰 부는 하늘이 내리는 것이다.
이런 섭리를 인정하지 않을 때 인간은 고통스럽다.
자신이 아무리 훌륭한 재주와 능력을 가졌더라도 운이 나빠서 혹은 때가 안되어 뽑히지
않거나 불합격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상황을 인정하고 비록 자신보다 능력과 재주가 못하더라도 먼저 목표를 달성한
사람에게 아낌없는 격려를 보내는 꼴찌는 진정 아름답다.
부모가 걱정할 정도로 성장이 늦었던 아인슈타인과 매사가 엉뚱하고 바보스러웠던
에디슨 그리고 청각 장애가 있었지만 음악의 거장이 된 베토벤.
이들은 한결같이 잠재되어 있는 천재성보다는 주어진 섭리를 따라 최선을 다했던 것이
우리들의 인생에 귀감을 주고 있는 것이다.
먼저 되고 나중에 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다만 부끄러움이 없이 살아가는 것이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과제이다.
우리는 이제 일등이라는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일등만능주의는 우리의 정신과 육체를 황폐하게 만들 뿐아니라 어떤 잠재적인 재능도
무력화시키며 그 존재의 이유도 망각하게 만든다.
인생은 운명이 아니라 선택(選擇)이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것은 인생을 떳떳하게 하며 후회없는
삶을 갖게 한다.
따라서 최선을 다하였다면 등수 때문에 자신을 자학하며 과거를 생각해서도 안된다.
인생은 실패할 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할 때 끝나는 것이다.
우리 삶의 목표는 일등이 아니며 편안함을 누리기 위한 것은 더 더욱 아니다.
삶은 고통스럽다.
인생은 행복보다 열배나 많은 고통과 슬픔을 동반한다.
작금의 현실은 영화나 소설처럼 반전(反轉)될 수가 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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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 포트 리에서 인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