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잘 난 체 하는 것을 좋아한다.
여편이 신문을 보고 몇마디 하면 그 다음 여편이랑 같이 간 모임에서 남편은 그 일에 관한 한 전문가가 된다.
"아, 그것은 이렇습니다.
.......
......"
남편의 말투는 어디서 몇 마디 전해들은 사람의 말투가 아니다.
마치 그 일에 대해 박사논문이라도 쓴 사람 같은 말투다.
어깨를 쫙 펴고 등을 꼿꼿이 세우고 표정마저도 근엄하여 누구라도 그 일에 관한한 남편이 꽤 박식한 줄로 착각하기가 쉽다.
다만 여편만이 진실을 안다.
혼자서 얼굴이 빨개진 여편은 속으로 중얼거린다.
'아이구, 또 시작이다. 저 인간에게는 무슨 말을 못한다니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여편은 말한다.
"제발 나에게 몇 마디 들은 소리로 어디가서 아는 척, 잘 난 척 좀 하지 말아요.
나도 신문에서 몇 줄 읽은 것 밖에 없는데 당신이 그렇게 잘 난 체를 하면 금방 들통날 것을 왜 저러나 싶어 오금이 저린다니까요.
정 그런 이야기에 끼어들고 싶으면 말투라도 어디서 들은 사람인 것처럼 하세요.
자기가 전문가인 척 하지 말고..."
"알았어. 내가 또 그랬나?
그래, 말 끝을 그런다던대요, 그런 것 같던데요, 뭐 이렇게 하라는 것이지?"
남편도 자기의 습관을 알긴 한다.
그다지 좋은 습관이 아닌 것도 안다.
하지만 오랫동안 굳어진 말투나 습관이 변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그래서 남편에게 는 것은 그런 말투나 습관을 고치는 대신 망신을 당해도 뻔뻔해지는 것이다.
봄에 사다 심은 피망 모종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다.
노랑, 빨강 피망을 사다 심었는데 모두 녹색 열매를 맺었다.
뒷뜰에 나가 이리저리 살피던 여편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그리고선 노래하듯 남편을 불렀다.
"여보, 여보, 이리와, 요것 보세요오~
노랑 피망, 빨강 피망, 심은 자리에
이상한 녹색 피망 매달렸어요.
아이참, 이상해요, 웬일이래요?"
여편이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지 안들리는지 남편은 티비에서 눈도 떼지 않는다.
여편은 집으로 들어 와 남편을 끌고 뒷뜰로 갔다.
"자, 봐요. 이게 무슨 색이지요?"
피망을 가리키며 묻는 여편의 말에 남편은 어이가 없다.
도대체 또 자기가 뭘 잘못했다는 것인지, 피망 색깔과 자기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남편의 표정을 보고 여편은 오히려 더 어이가 없다.
어쩌면 몇 달 전에 자기가 한 말을 이리 깡그리 잊어버릴 수가 있을까?
"당신, 정말 기억 안나요?"
"뭘?"
"당신 방선배랑 있는 자리에서 날보고 잘 난 체 한다고, 제발 그만 잘 난 체 하라고 그랬잖아요.
당신은 빨간 피망은 어릴 때부터 빨간 피망이 열리고, 노랑 피망은 처음부터 노랑 피망이 열리는 것이라고 했잖아요.
내가 처음에는 녹색이다가 나중에 익으면 빨강이나 노랑이 된다고 했더니 아무거나 잘 난 체 한다고 날 비웃은 것 잊었어요?
자, 봐요. 잘 난 체 한 사람이 누구인가?
내가 그랬잖아요.
아무리 잘 난 체를 하고 싶어도 식물에 대한 것만은 나에게 지라고...
예전에 내 꿈 중의 하나가 농사꾼이 되는 것이었다고...
그 날도 빨간 피망과 녹색 피망이 같이 매달린 사진을 분명히 본 적이 있다고 해도 내 말을 안믿었지요?"
남편은 그제야 생각이 어렴풋이 난다.
"아, 그랬던가?"
"망신스럽지 않아요?"
"내가 그런 일이 한두번인가? 새삼스레 망신스럽긴 뭘..."
"그럼, 무게라도 잡지 말던지...
그날도 무게 잡고 날 혼냈잖아.
여자가 건방지게 나설 때나 안 나설 때나 나선다는 듯이..."
"아 그거야, 그날은 그렇게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런 것이고..."
남편은 자기는 잘 난 체를 해도 남이 잘 난 체 하는 꼴은 못 본다.
여편은 가끔식 그런 남편을 혼자서 잘 난 체 하려고 그러는 것이라 공격하기도 한다.
"이 다음엔 식물에 대해선 나보다 잘 난 체 하기 없기요?"
여편의 속셈은 어느 한 부분이라도 남편보다 확실한 우위를 점해 놓자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긴 아무리 남편이 잘 난 체 해도 여편의 잘 난 체를 따라가려면 신발벗고도 어림없다.
오늘도 어김없이 남편의 항복이다.
남편은 풀 죽은 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알았어, 앞으로 명심할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