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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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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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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에 취한 새벽녘


BY 개망초꽃 2004-10-04

술 먹을 체질이 못 돼, 머리가 아파 죽겠네.
난 술을 많이 먹었다 싶으면 머리가 먼저 아파온다.
백세주를 서너잔 마시고, 몇 잔 마셨는지 확실한 증거는 없다.
소콜을 또 서너잔 마셨다. 소콜이란 소주에 콜라를 반반씩 섞은 걸 말한다.
탄산 음료도 싫어하는 난 소주 이상은 안 마시며 살아왔다.
처음 술을 먹기 시작할 때 맥주로 시작을 해 청하로 가다가 요즘은 산사춘이나
백세주를 마시고 있다. 그것도 두 잔이면 세상이 약간 우습게 보일 정도로 기분이 좋을라하는데
그 이상을 마셨다하면 머리가 반으로 갈라지고, 새벽녘엔 열등분으로 나눠질 듯이 아파서
밤새 잠이라는 것이 나를 빗겨가서는 후회로 나를 맞서게 한다.
친구는 소주병을 치켜들며 빈 내 잔에 따르려고 하는 걸 소주는 못마신다고 잽싸게 치웠더니
소주반잔에 콜라를 시켜서 한 잔을 만들어 주었다.

실로 몇 년만에 몸을 이기지 못할만큼 술을 마셨나?
술이 좋아 술을 마신적이 없었다. 내 몸을 이기지 못하게 마신적은 이번이 세 번째인듯하다.
정확히 세번째라는 것에 확실한 증거는 없다.
처음으로 기어다닐 정도로 술을 마신적은 8년전이었다.
맥주 반 컵 정도면 더 이상은 술 먹을 맛도 이유도 없었던 시절이었는데
양주를 맥주컵에 따라 물 마시듯 후다닥 마시고 남편 앞에서 남편 이름 석자를 불렀다.
"이 도 박? 한 여자를 데려다가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 수 있어?
아이들 아니면 이도박? 넌 벌써 쫒겨났어."
새벽이 오도록 거실을 기어다니며 치사하게 내 신세를 탓하며 울었다.
내 인생을 내 맘대로 할 수 없었길래, 한 남자로 인해 나는 없어져 버렸길래,
술의 힘을 얻어 내 인생을 다시 찾으려는 첫 시도를 남편에게 일방적으로 통보를 해 버렸다.
"오늘부터 별거 해야겠어."
남편의 어이없다는 표정이 방바닥에 떨어졌다가 벽을 기어 올랐다가
천정으로 붙었다가 내 얼굴위로 정확하게 꽂혔다.
"보따리를 싸가지고 이 집을 나가든지 아님 작은 방을 쓰든지 알아서 해."
남편의 이그러진 표정이 식탁에 차려졌다가 유리창에 미끄러지더니
텔레비전으로 영상화 되더니 내 눈속으로 깊게 들어왔다.
"이제 다 끝났어. 더 이상 우린 부부가 아니야. 아이들 때문에 호적은 그대로 두겠어."
그렇게 말하고 양주를 더 따라서 마시려고 했더니
유리컵은 순식간에 남편 손에 들려져 방바닥에서 조각이 나 버렸다.
"그래 우리도 유리컵처럼 조각나 버렸지...다시 붙힐 수가 없는 조각난 유리컵이지..."
유리컵 같던 우리 부부는 베란다로 향한 통 유리문을 열고,
사랑초가 고웁게 피어난 베란다로 나가서 베란다 창을 열고
난간을 밟고 올라가 11층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우리 부부는 잔디가 고웁게 깔린 정원에서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처음으로 질척거리게 취한 그 날 그 새벽녘에...

두 번째로 술에 진탕 취한날은 남편과 한지붕 밑에 각방을 쓰게 된 후
그렇게도 그리던 첫사랑과 편지로 재회를 하던 봄날이었다.
편지를 쓰면서 젊은날 그 시절로 되돌아 가서는 아직도 남은,
아직도 못다이룬 마구잡이 사랑때문 인생이 마구잡이로 엉켜들고 말았다.
밥을 먹으면서도 이십대초반의 추억 때문에 목이 막혀 물만 꼴닥꼴닥 마셨고,
가요 한소절에서도 남들이 들으면 유치하다할 첫사랑인듯해서 눈물이 고여들고,
살구꽃잎이 휘휘 날리듯 내 사랑도 꽃잎처럼 갈 곳을 몰라 봄바람에 어지럽던 날,
혼자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무슨 술이었는지 확실한 증거는 없다.
아파트 아래 세상은 아무도 보이지 않고 남쪽 끝 바닷가에 사는
오직 그 사람만이 나를 지배하고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하고
나라는 보잘 것 없는 존재를 다시 깨어나게 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놈의 운명의 장난은 그리 말랑말랑거리지 않았다.
운명은 손 끝에 닿는 나뭇잎이 아니었고, 내 발에 맞는 신발이 아니었고,
내 가슴에 품을 수 있는 털인형이 아니었고,
내 머리를 편안하게 눕힐 수 있는 베개가 아니었다.
그 사람은 이미 십 몇년전에 한 여자의 남편이 되었고, 두 아이의 아버지였으며
수백명 학생을 가르치는 국어선생이었다.
내 손으로 고웁게 물든 단풍이 든 나뭇잎을 따서 책갈피에 꽂아 놓고 싶었다.
내 발에 맞는 편안한 운동화를 신고서 들길을 거닐고 싶었다.
항상 내 품에 품을 수 있는 보송송한 강아지 인형처럼 그 사람을 내 품에 안고 싶었다.
편안하게 안주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내 사랑을, 방황하던 내 사랑을, 마지막 역에서 내려
이젠... 이제는 정말 영원히 쉬고 싶었다.
술에 취해 혼미해져 그 사람 이름을 불렀다.
얼마나 부르고 싶었던 이름이던가?
차마 소리내어 부르지 못한 이름...
난 뚜렷하고 선명하고 당차게 술에 힘을 빌려 그 사람 이름을 불렀다.
부르면 안되는 이름을 다시는 불러 일으키면 두 가정이 마구잡이로 흔들일 이름을...

오늘이 세 번째로 술해 취해 머리가 깨져 열조각이 날 것 같아
비오는 새벽녘 창밖을 내려다 보았다.
저 놈의 비 때문에 잠이 안 오는 가?
새벽도 술 취한 나와 같이 깨어 정리된 화단이 선명하게 보였다.
쥐똥나무 울타리가 반듯하게 정돈이 되어 시멘트 벽 같았고,
푸른 잔디가 고르게 깍아져 거실 카페트 같았다.
9월이 지나 10월이 왔지만 가을빛은 흐릿하다.
새벽부터 부지런한 어느 집 할머니가 음식 찌꺼기를 들고 음식 쓰레기 통에 버리고 있군.
으아...저 많는 차들...주차장엔 빈틈도 없이 차가 참 많이도 서 있구나.
파란 윗옷을 입은 경비아저씨가 청소를 하는군...왜 경비아저씨 옷은 파란색일까나?
머리가 깨어질 듯 아프다면서 별 생각을 다하는군...나도 참 심심하군,아니 한심한건가?
재미있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 재미날 것도 없는 그저 그런 가을이구나.

난 이제 술에 취해도 거실로 불러 내 큰소리치며 한탄 할 남편도 없다.
이름 석자 불러 그리워 할 사랑도 없다.
내가 부를 수 있는 이름은 내가 떠나 보내고, 내가 부르고 싶은 이름은 벌써 떠나 돌아서 버렸다.
오늘은 부를 이름이 없다.
아...비만...가을비만이 옹골져 무너진 가슴팍으로 차갑게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