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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야기]세상에서 가장 부자가 된 여자


BY 범지 2004-09-30

스물네살 여름이었을 무렵..그애를 처음 만났어요.
전 건설회사에서 관리직 업무를 보고 있었죠.
며칠전 관리과장님이 여름방학이라 고등학교 토목과 졸업반 인턴사원 두명이 실습올거라 하셨는데 어느 햇빛 쨍쨍한날 과장님과 함께 두 학생이 사무실로 들어왔어요.
문이 열릴때 그들의 뒤로 비치는 후광때문에 얼굴을 바로 보질 못했는데 문이 닫힘과 동시에 아주 잠깐.. 0.5초 정도의 순간에 그애와 눈이 마주쳤답니다.
등줄기로 찌릿한 기운이 느껴졌죠.

결혼은 미친짓이다 라고 했던가요?
아마 사랑도 미친짓인가 봅니다...
그애가 고등학교 3학년생이란걸 알면서도 스물네살의 전 첫눈에 마음을 뺏겨버렸으니...
하루하루 무의미한 일상이던 제 생활이 매일아침 그를 본다는 즐거움 하나만으로도 출근길이 행복해졌고 가끔 그애가 제곁을 스치기라도 하면 숨이 막혀버릴 정도로 심장이 두근거렸으니 사랑의 열병이 찾아온거죠.
주책맞은 감정을 숨기느라 일부러 그애 앞에선 더욱 푼수끼를 떨어야했답니다.
그런 제가 재미있었는지 그애는 여직원중 저에게 더욱 친근하게 대해주더군요.
누나~ 밥사줘요. 누나 애인있어요? 하면서..

저에겐 삼년간 사귄 남자친구가 있었어요.
그 무렵 서로에게 지쳐 많이 힘들어하고 있을 때였어요.
그런 상황에서도 또다른 사랑의 감정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도 당황했었죠.
이건 아니다 싶어 내감정을 애써 무시하며 그저 아끼는 동생인양 편하게 대해주려 노력했어요.
그냥 편하게 밥 같이 먹고, 비가 오면 같이 우산쓰고..
그러는 사이에 조금씩 그애에게 마음을 들켜버렸던 걸까요...
아니면 그도 처음부터 저처럼 저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일까요...
전과는 달리 둘이서만 있을땐 그가 많이 어색해하는걸 느꼈어요.
저도 더이상 혼자서 푼수짓을 하는 일이 전처럼 쉽지가 않더라구요.
제 앞에선 그앤 자꾸만 말이 없어져 갔고..
전 혹시라도 심장뛰는 소리가 그에게까지 들리진 않을까 한발짝 비껴서게 되고..
그러던 와중에 남자친구에게서 이별통보가 왔어요.
하지만 예상했던 일이어서인지 아니면 그가 옆에 있어서인지 그리 슬프진 않더군요.

여름의 끝자락이었지만 여전히 무덥던 어느 토요일..
다른 남자직원이 영화보러 가자고 하더군요.
사실 그애와 너무 가고 싶었지만 무슨 맘에서였을까 그러자고 해버렸어요.
그에게로 향하는 제마음을 추스리고 싶었던거겠죠.
시간약속을 하고 극장 앞으로 나갔는데 그자리엔 그애가 나와 있는거 아니겠어요.
형이 다른 일이 있다해서 누나 바람맞힐 수가 없어서 내가 대신 나왔노라고 하면서요.
우린 처음으로 나란히 앉아서 영화를 보았죠.
영화를 다본후엔 "누나 내가 가자는데 갈수 있어?" 하면서 자신의 애마에 저를 태워 놀이공원으로 데리고 가더군요.
처음으로 오토바이를 탄 남자의 등을 안아보았는데 그땐 마치 천장지구의 주인공들이라도 된듯한 기분이었죠.
즐겁게 하루를 보냈고...집앞에서 그앤 사랑을 고백해왔어요.
누나가 좋아졌다고.. 이젠 누나라고 부르지 않겠다고..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던 속도만큼이나 우리의 사랑도 깊어만 갔답니다.

6개월후 그앤 군입대를 하게 됐어요.
슬펐지만 그애 앞에선 조금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죠.
전 이미 한번의 경험이 있기도 했지만 왠지 슬프지가 않더군요.
기다려달란 말도 기다리겠단 말도 하지 않았고 그저 시간이 흘러가기만을 바랐던거죠.

그러고도 몇달후..
헤어진 남자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더군요.
미안하다고..널 잊을 수 없노라고..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저의 첫사랑이, 삼년간 마음을 주었던 사람이 미련의 한자락을 붙잡았지만 그건 미련일 뿐이란걸 알게됐죠.
그를 다시 보니 아주 잠시동안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지만 그애가 마음 한켠을 잡고 놓아주질 않더군요.
미안해..우린 끝났어..라고 말하고 끝내 뒤돌아서 나와버렸어요.

그때의 고등학생, 다섯살의 연하남은 지금의 제남편이란 이름으로 제옆을 지켜주고 있답니다.
아버진 TV에서나 나옴직한 "내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절대로 안된다"는 식의 말들로 우리의 결혼을 극구 반대하셨지만 그도 포기할 수 없다며 마당에서 무릎을 꿇고 아버지께 매달릴 정도로 몇날몇일을 간곡히 빌어서 결국 결혼승낙을 받아냈답니다.
우린 지금 아들 딸 쌍둥이 낳고 잘 살고 있어요.

결혼과 동시에 전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세상에서 가장 능력있는 여자가 되어버렸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