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여덟시.
며칠을 미루고 미루다가 출국 날짜에 임박해서야 주섬주섬 꾸린 계륵같은
보따리들을 배웅 나온 친구의 승용차에 싣고 인천국제공항을 향해 달렸다.
태풍 메기가 몰고 온 장대비는 마른 대지를 흥건히 적시고도 부족했던지
내 마음은 물론이고 친구의 마음까지 질펀하게 적시고 있었다.
굿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빠른 시간에 공항에 도착하였지만 출국
수속을 하기위해 줄지어 늘어선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지난번 동남아 여행을 갈 때도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서 출국 수속을
밟느라 적잖은 시간을 낭비했는데 오늘도 미국으로 떠나는 많아 어김없이
시간을 허비할 것 같다.
가방 보따리들을 커터에 실고 줄을 서니 뱃가죽이 등에 붙은 듯하다.
어젯밤에 친구들과 송별식을 치르느라 저녁 식사를 술과 안주로 대충
때우고 말았는데 아침 식사도 입맛도 없었고 바쁘기도 해서 거르고 말았다.
한 시간 가까이 기다리다 겨우 출국 수속을 마칠 수가 있었으나 아직도
입맛은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먹새 좋은 친구가 허기져 보여 서둘러 공항 내 음식점을 찾았다.
음식점 몇 군데를 염탐하다 겨우 들린 곳이 일식집이었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주문한 음식이 나오질 않았다.
시계를 보니 보딩타임이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종업원을 불러 어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주방을 다녀 온 종업원, 죄송하다며
미안해 어쩔 줄 모른다.
음식 주문이 안 들어 갔단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또 있을까?
출국 수속 밟는데 한 시간 허비하고 주문한 음식 먹어 보지도 못하고 맥없이
의자에 앉아 30분 마져 죽이고 말았다.
비내리는 아침에 날 굿이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리가 타임킬러도
아닌데 두 시간 가까이를 그렇게 보냈다.
하는 수 없이 페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와 음료로 줄인 배를 채우고 친구와
아쉬운 작별을 하였다.
이제는 나를 44년 동안 온 몸으로 받아 주었던 조국과 이별할 차례이다.
알 수 없는 힘에 의하여 끌려가듯 미국 행 비행기에 올랐다. 육신은 아무런
느낌과 의식도 없이 메모리된 프로그램에 따라 행동하는 로보트와 같았다.
내가 왜 이 나이에 조국을 떠나야 하는지, 그리운 가족,친구들과 이별을
해야 하는 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무의식 상태에서 대한항공 081편에
지친 몸을 실을 뿐이었다.
지정된 좌석을 찾아 착석을 하고서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정신이 조금씩
돌아 오는 것 같았다.
그 때서야 주위를 둘러보니 좌석이 많은데 빈 좌석이 한군데도 없다.
이 많은 사람들은 왜 한국을 떠나는 걸까?
무슨 볼 일이 많아 14시간 동안이나 비행하는 고통을 감수하면서 탑승을
했을까?
다들 같은 사이즈의 좌석에 앉아 있지만 얼굴의 생김새와 표정들은 제각기
다르다. 그러나 잔잔한 미소로 서비스하는 여승무원들의 표정은 한결같다.
갈증이 났다.
승무원에게 음료라도 부탁할까 했지만 바쁘게 움직이는 승무원을 보니 괜히
미안한 생각이 들어 포기하고 대신 마른침을 삼키고 말았다.
비행기는 30여 분의 워밍업 끝에 드디어 힘차게 대지를 박차고 올랐다.
머리에 압박 붕대를 감은 듯한 느낌이 한참 동안이나 지속되더니 서서히
압박 붕대가 풀리는 듯하고 머리도 한결 가벼워지고 정신도 되돌아 오는
것 같았다.
와이셔츠의 단추 구멍 같은 창문을 통해 뭉개 구름들이 눈에 들어 온다.
땅을 내려다 보니 비행기는 이미 높은 상공에 올라 장대비 내리는 조국의
산하가 보이지 않아 답답하고 아쉽다.
만감이 교차한다. 잡초처럼 살았던 40여 년의 삶들이 낡은 다큐멘터리
흑백 영상이 되어 뇌리를 스쳐 갔다.
그 영상의 클라이맥스에는 어머님이 계셨다.
고향에 홀로 계신 어머님은 늙고 병든 노파의 모습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젊었을 때의 그 미모는 세월에 할퀴고 뜯겨 온데 간데 없고 무심한 늙음만
남아있지만 그나마 친구의 어머님들처럼 힌 머리카락이 많지 않아서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1년 전, 가족들과 미국 행을 동행하지 못하고 혼자 서울에 남아 있다고
했을 때 어머님은 왜, 같이 안 갔느냐며 물으셨다.
사정이 그렇게 됐다고 하자 어머님은 내 배 아파 낳은 자식도 같이 살지
않으면 남의 자식보다 못한 법인데 하물며 헤어지면 남남인 부부는 너무
오랫동안 떨어져 살면 탈이 생기기 마련이라며 내게 하루라도 빨리 새끼들
곁으로 가라고 꾸지람을 하셨다.
그리고 가족의 생계까지 걱정을 하시며 긴 한숨을 젖은 땅바닥에 주단을
깔 듯 내려 놓으셨다.
또한 고향에 내려가 어머님과 마지막 밤을 새던 날, 어머님은 내게
너덜너덜하고 두툼한 하얀 편지봉투를 건 내 주셨다.
봉투의 내용물을 무심코 들쳐 보고서 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얼마 동안을 아끼고 모으셨을까, 빛 바래고 구겨진 만원권들이 봉투 가득
차곡차곡 채워져 있었다.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나왔다.
"어머니 이게 무슨 돈이 예요?" 눈물을 감추기 위해 이를 악물며 물었다.
"미국가면 고생할 텐데 필요한데 보태 써라, 얼마 안 되서 미안하다."
잠시 나는 할말을 잃었다.
아, 어머님. 어머님께서 피처럼 소중하게 간직한 돈을 나는 받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머님은 막무가내, 둘이서 한참 동안이나 말씨름이 오간 끝에
봉투에 든 돈의 절반만 받기로 하고 상황은 종결되었었다.
그리고 막상 자식을 먼 나라로 떠나 보내는 게 아쉬웠던지 어머님은
내게 조용히 물으셨다.
" 꼭 미국에 가야 하니? 안가면 안 되는 거냐. 왠 만하면 여기서 살아라."
또 답변을 드릴 수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어머님께 작별 인사를 드리고
자동차를 타려는데 어머님은 굳이 광주공항까지 따라 나오시겠단다. 하는
수 없이 어머님을 광주까지 모시고 올 수 밖에 없었다.
영상이 끝날 무렵, 마른 눈에서 이슬이 맺히는 듯 두 눈에 눈썹이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하지만 어찌하랴, 나의 제 2라운드 인생은 먼 이국에서 시작하라는 신의
뜻인데 이제와서 거부할 수도, 되돌릴 수도 없는 나의 삶인걸. 주어진
상황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비행기가 시속 900키로 미터 이상으로 14시간이나 고속 비행하는 동안
나는 어머님의 말씀을 되뇌었다.
그리고 존 에프 케네디 공항에 마중 나와 환한 웃음으로 나를 맞이할
가족들을 생각하며 그간의 기러기아빠의 삶 또한 청산하고 있었다. 잠시
후 난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고요한 꿈길에서 어머님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내 배 아파 낳은 자식도 같이 살지 않으면 남의 자식보다 못한 법인데
하물며 헤어지면 남남인 부부는 너무 오랫동안 떨어져 살면 탈이 생기기
마련이다."
"꼭 미국에 가야 하니? 안가면 안 되는 거냐. 왠 만하면 여기서 살아라."
먼 훗날, 가족을 데리고 꼭 컴백하여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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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 포트 리에서 인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