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4
스위치를 내리자 형광등불빛들을 순식간에 밀어낸 어둠은 성전(聖殿)을
게릴라처럼 점령해 버렸다.
어둠이 내리자 기도하던 성도들의 목소리가 더 간절해지고 급기야
여기저기서 울음소리까지 들리기 시작한다.
곁에 앉은 아내도 평소와 달리 사뭇 진지하여 왠지 낯설기까지 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성전은 마치 울음계곡을 지나는 듯 질퍽하였다.
하나님 아버지. 주여 등등 한결같이 절실하고 절박한 단어파편들은 허공을
가로질러 화살처럼 고막에 꽂힌다.
성도들 모두가 일생동안 겪을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단 몇 분의 기도에
압축하였다가 활화산이 폭발하듯 분출하고 있는 것 같았다.
헤아릴 수없는 통성들을 기록한다면 바이블 내용보다 양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 디자인회사를 운영할 당시에 세 명의 디자이너가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는데 가끔 새벽기도를 다녀 왔다는 말을 하였었다.
나도 교회는 가끔 나갔지만 기도에는 별 관심이 없어 새벽기도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을 때였기에 사람들이 꼭두새벽에 나가 가슴을 헤집으며 쉰
목소리와 마른 눈물을 허공에 뿌리는 이유를 나는 발견하지 못했다.
다 팔자대로 살 것인데 무슨 영달(榮達)을 더 꾀하겠다고 저렇게 피곤한
신앙생활을 할까? 오히려 질책을 할 정도였다.
당시에 내 말을 예수님께서 들었다면 법을 잘 알면서도 위선적인 삶을 산
서기관이나 바리새인과 같이 나를 이리떼로 취급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의 딸아이에게서 한 통의 메일이 왔다. 너무 감동받은 영화가 있는데
아빠도 꼭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평소에도 영화를 워낙 좋아해 아이의 말에 솔깃해질 수 밖에 없었다.
추천한 영화의 제목을 보니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였고 얼마 전부터 내가
꼭 봐야겠다고 찜을 해 놓은 영화였다.
개봉도 되기 전에 내가 이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이유는 멜 깁슨
때문이었다.
내가 멜 깁슨을 알게 된 계기는 95년도에 개봉한 브레이브하트였다.
내용은 스코틀랜드의 전설적인 기사 윌리엄 월레스의 사랑과 투쟁을 그린
것으로 멜 깁슨이 감독, 제작, 주연하여 그에게 아카데미 감독상의 영광을
안겨 준 작품이었는데 나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여금 비디오를 통해서 몇 번을 더 보았고 멜 깁슨을 좋아하게 되었다.
이후 멜 깁슨이 출연한 영화는 쟝르에 구분없이 감상하였는데 때마침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멜 깁슨이 제작,감독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개봉 첫날 나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봤다.
예수의 죽음에 대한 사실적 묘사와 반유대인적 내용으로 제작 단계부터
많은 논란을 일으켜 유태인들과 일부 기독교 신자들의 반발로 제작 기간
중 상당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는 영화로 예수가 죽기 전 12시간 동안의
이야기를 집약한 것이었다.
돈에 눈이 멀어 예수님을 팔아 넘긴 유다는 예수님에게 사형 선고가 내린
것을 보고 뉘우쳐 은화 30개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되돌려 주며
"내가 죄없는 사람을 죽이려고 팔았으니 정말 큰 죄를 지었소" 말한다.
하지만 그들이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소? 당신이 알아서 할 일이오"
하며 냉정하게 뿌리치자 유다는 그 돈을 성전에 내던지고 나무에 목을
매달아 자살을 한다. 그 후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에서 어머니인 마리아를
바라보며 그녀만이 이해할 수 있는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기고 숨을 거둔다.
"다 이루었도다.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
이어 영화는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을 암시하는 영상으로 마무리된다.
많은 사람들이 눈시울이 발갛게 달아 올라 영화관을 빠져 나왔다.
나도 그 중에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사실 영화 내용에 감동 받지는 못했다.
내가 눈물을 흘렸던 이유는 예수가 신이 아닌 인간적인 모습으로 그려지는
과정이 한 편의 수기를 본 것처럼 너무 안타깝고 불쌍했던 것이다.
미국에 온 후 교회를 본격적으로 나가기 시작했고 한 달여 만에 난 눈물의
새벽기도 광경을 처음 지켜보았다.
솔직히 처음에는 어리둥절하기도 했지만 차츰 분위기에 적응이 되어가면서
사람들의 신념을 볼 수 있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곳에서도 한줄기의 빛을 기대하는 그들의 신념은 참으로
놀라웠다. 그 무엇으로도 그들의 기도를 멈출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세상에는 신과 귀신 그리고 인간, 세 가지의 영적인 존재가 있다고 한다.
이 중에 인간은 외부의 핍박으로부터 가장 나약하면서도 가장 강한 존재다.
인간이 가장 나약할 때는 귀신을 믿을 때이고 가장 강할 때는 신을 섬길
때이다. 영화에서 예수 그리스도도 죽음 직전 마지막 유혹에 직면한다.
아버지가 자신을 버렸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하지만 그리스도는
신념으로 두려움을 극복한다.
진정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보통사람들보다는 신념이 강해 보였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 세 번의 인연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부모와 만남이고 둘째는 배우자와 셋째는 자식과의 만남이 있는데
여기에 넷째의 인연을 추가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이라고 하였다.
나는 이제야 네 번째의 만남을 준비하고 있다.
불혹의 나이가 되도록 솔직히 난 종교에 대해 비판적이고 회의적일 때가
그렇지 않은 때보다 훨씬 많았다.
내 아집보다는 주변의 사건들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어린 자식이 병들어 죽어가는데도 병원을 가지 않고 오직 자신이 섬기는
신만이 모든 병을 치료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죽은 자도 살려 낼 수 있다고
믿는 광신자를 보았으며 법을 잘 아는 자가 법을 잘 지키지 않고 오히려
법을 악용하는 경우처럼 하나님을 잘 아는 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자신을 추종케 하고 하나님을 빙자하여 자신의 배를 채우는 위선자들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신을 맹신하면 가정과, 이웃과, 사회가 병들고 신을 빙자하면 스스로의
영혼이 파괴된다.
인간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양심의 가책이다.
양심의 소리는 신(神)의 음성과 동격이며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는 가장
거룩한 곳이요, 인격이라는 지성소이다.
나는 삼일 동안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서 새벽기도를 나갔지만 기도의
시간은 날마다 단 30초가 한계였다. 할 말이 더 이상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느냐 못 받느냐에는 별 관심이 없다.
신앙을 가짐으로써 예전보다 더 많은 도덕성과 양심을 실천할 수 있고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마다 기도로써 일상의 평안을 얻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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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 포트 리에서 인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