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2
한국을 떠나 올 때 남에게 속내를 드러낼 수 없는 고민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것들은 내가 평생을 눈에 달고 살아 온 고민들이기도 하다.
유년시절 나는 주사를 맞는 일과 흔들리는 이빨 빼는 일 그리고 머리 깎는
일이 제일 큰 고민이었었다.
학교에서 전염병예방주사를 맞을 때면 어떻게 하면 맨 뒤에 설까 선생님의
눈치를 보느라 허둥댔었고 이빨이 흔들릴 때마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못하고
혼자서 밤을 새며 가슴앓이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위의 두 가지 고민은 유년시절을 벗어나면서 걱정의 강도가 차츰 약해졌지만
어인 일인지 머리 깎는 일만은 불혹의 나이가 되었는데도 더 커지기만 하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어릴 적 아버지께서는 우리형제를 양지바른 토방에 앉혀 놓고 차례로 머리를
깎아 주셨었다.
아버지께서 머리 깎는 바리캉을 챙기실 때마다 우리형제는 두려움에 떨어야
했고 서로 먼저 깎지 않으려고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곤 했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걱정은 아랑곳 않고 머리카락이 더 긴 자식부터
바리캉을 갔다 대셨고 바리캉은 배가 고팠는지 찌걱찌걱 거리며 머리카락을
잡아 먹으려 안달이어서 우리 형제는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고통스러워했다.
그 때마다 아버지는 낡은 바리캉을 탓하는 게 아니라 참을성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우리를 나물하셨고 쥐가 파먹은 듯한 까까머리를 보고 나서야 바리캉에
재봉틀기름을 잔뜩 칠하고서 상태를 확인하시곤 하였었다.
머리를 깎을 때마다 갖는 두려움의 강도가 어릴 적에 비해 지금은 조금
약해졌지만 그 두려움은 아직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오래 전부터 미용실 한 곳을 정해서 한 사람에게만 내 머리를
맡겼다.
어쩌다 낯선 미용실을 가게되면 의자에 앉는 순간부터 두려움이 몰려 온다.
과연 이 사람이 머리를 내 맘에 들게 잘 깎을 수가 있을까부터 혹시 초보라서
내가 실습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닌지 도무지 마음이 조마조마해서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그렇게 깎은 머리가 마음에 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문밖을
나오는 순간부터 그 미용실은 내게 욕을 바가지로 얻어 먹어야 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발은 한 번 잘못하면 머리가 다시 자랄 때까지
어찌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고 거울을 볼 때마다 억울하고 아무리 맵씨 좋은
옷을 입었더라도 폼이 나지 않아 마음까지 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단골 미용실을 가면 어떻게 깎아 드릴까요 물어 보지도 않고 의자에
앉으면 편안한 아랫목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미국에 오기 한 달 전 미용실에서 뜻하지 않는 소문을 하나 접했다.
미국에 가면 미용요금도 비싸면서 잘 깎지도 못한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유학생들이나 관광객들은 미국 가기 전에는 꼭 한국에서 머리를 깎고
간다는 것이었다.
그 소문을 듣는 순간 미용사하고 말도 안 통하는데다 실력도 엉망이라는데
어찌하나 싶어 은근히 걱정이 되기 시작하였고 나는 조심스럽게 사실을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의 가족들에게 물어 본 결과 미용요금이 비싸다는 소문은 사실로 확인이
되었지만 실력은 사람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가늠하기 어렵다는 얘기였다.
머리카락이 길어지고 미국에 갈 날이 가까워질수록 나의 걱정은 고무풍선처럼
커져만 갔고 드디어 미국에 도착하여 머리를 깎아야 할 시기가 오고 말았다.
아들 녀석을 불러 조심스럽게 물었다. 째째하다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였다.
"예총아. 여기 가장 싼 미용실이 어디냐?"
"다 비슷비슷해 아빠. 그냥 집 앞 미용실에서 깎아."
이 녀석, 자기 머리 아니라고 참 편하게 말도 한다 싶어 내심 기분이 상했지만
아들 녀석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왜냐하면 미국에서 처음 가는 미용실이라 혼자 가기에는 두려웠던 것이다.
그런데 아들 녀석 길을 걸으며 뜻하지 않는 말을 한다.
"아빠. 여기 미용실 다 한국 사람들이 머리 깎아."
"그래! 그럼 말도 다 통하겠네?"
아들 녀석 말처럼 찾아간 미용실 주인도 한국여자이고 미용사도 한국 여자였다.
다른 지역은 아직 모르겠지만 여기 뉴저지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용실과
이발소가 공존하는데 한글로 된 간판의 업소는 주인이 다 교민들이다.
그래서 이용하는 손님들도 거의 한국인들이다.
현지인들은 거의 교민들의 업소를 이용하지 않고 자기들만이 드나드는 업소가
따로 있거나 집에서 손수 머리를 깎는다고 한다.
삼십대 중반의 미용사는 웃는 얼굴로 어떻게 잘라 줄까요? 하고 내게 물었다.
난 한국에서처럼 느긋하게 지금의 모양대로만 깎아 주세요. 하였다.
미용사는 염려와 달리 마음에 썩 들도록 머리를 손질해 주었고 미국에서의 첫
이발은 꽤 성공적이었다.
다만 아쉬웠던 일이 있었다면 미국 문화를 파악하지 못한 채 머리를 깎았다가
미용사에게 미안한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는 것이다.
미국의 사회는 팁 문화가 오래 전부터 정착되어 있다.
그래서 특히 음식점이나 미용실 등을 가면 반드시 청구액의 15~20%정도를 더
얹어서 서빙해준 이에게 팁으로 주어야 한다.
이런 상황도 모르고 머리 깎은 비용 17불만 달랑 주인에게 건네고 나왔으니
그 미용사는 얼마나 섭섭했을까.
귀가해서도 다시 가서 팀을 주고 올까 생각도 했지만 다시 가는 것이 아무래도
우세스러울 것 같아 접었지만 나중에 머리를 깎을 때면 두 배의 팁을 주겠노라
마음을 먹고 있다.
나는 아직 모든 것들이 어설프다. 오랫동안 여기서 생활한 교민들이 나를 보면
강가에서 노는 어린아이같은 느낌이 들 것이다.
내일은 처음으로 달러를 스스로 벌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비록 아르바이트 비슷한 일이지만 미국 문화를 접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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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 포트 리에서 인연...